▲ 배다리 책방거리 뒤쪽의 여인숙 골목.


70·80년대 친구네가 하던 여인숙의 이름은 '불'여인숙이었다. 입구에 걸려 있던 불꽃이 그려진 작은 간판이 아직도 기억난다. 당시 여인숙은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가끔 카운터를 지키며 물주전자와 수건, 그리고 숙박계를 방에 밀어 넣었던 그 친구를 통해 야릇한 '이야기'를 전해 듣곤 했다. 그 때문인가 아직도 '여인숙'이란 말만 들어도 묘한 후끈거림이 있다.

얼마 전 동구 배다리 헌책방 뒤쪽에 있는 속칭 '여인숙 골목'을 찾았다. 진도여인숙, 길조여인숙, 성진여인숙, 그리고 명진여인숙이 줄지어 있던 이곳은 이제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다. 몇 해 전부터 빈집이 되었다.

공동화장실 겸 목욕탕, 둘이 누우면 한 뼘도 남지 않는 쪽방과 어두운 복도에는 하룻밤 묵고 간 이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이 골목은 배다리의 성쇠와 궤를 같이한다. 6·25 전쟁 후 배다리 부근에 장이 서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장터 따라 온 뜨내기들의 거처로 여인숙이 들어섰다.

이후 산업화 시절 급히 상경한 노동자들의 임시 숙소가 되기도 했고 야통(야간통행금지)시절 취객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간혹 인근의 미림극장, 문화극장에서 마지막 프로를 보고 나온 젊은 연인들이 골목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상권의 침체와 함께 숙박객도 줄어들었고 일용직 노동자에게 '달방'을 제공하며 그 명맥을 이어가다 결국 문을 닫았다.

최근 동구는 이 여인숙 골목을 전시와 문화 숙박이 가능한 갤러리복합형 게스트하우스로 조성해 새 손님을 맞을 계획을 세웠다. 사람이 머물고 문화와 역사가 머무는 여인숙으로 '신장개업'한다는 구상이다. 친구네 여인숙 상호는 왜 '불'이었을까. 사업이 활활 타오르라고 그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동구의 여인숙 골목 사업도 후끈 달아오르길 기대한다.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