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노동자 주도 '미완의 투쟁' 훗날 민주화 밑거름으로
▲ 18일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을 주제로 열린 2019년 인천 민속 문화의 해 특별전 갤러리 콘서트에 연사로 나선 이우재 인문학 서당 '온고재' 대표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 18일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을 주제로 열린 2019년 인천 민속 문화의 해 특별전 갤러리 콘서트에 연사로 나선 이우재 인문학 서당 '온고재' 대표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photohecho@incheonilbo.com

 

1986년 주안동 일대 '5·3 민주화운동'…1만명 운집 "전두환 정권 타도" 외쳐
야당 균열·소그룹·급진화 등 한계도
철저한 내부반성·조직화로 변화 시도…1년 후 전국 규모 '6월항쟁' 발판 역할

인천 5·3민주화운동 또는 5·3민주항쟁, 그리고 5·3사태.

1986년 5월3일 인천 주안에서 1만여 명이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친 대규모 가두시위가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의 디딤돌로 평가되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최대의 시위. 이우재 인문학 서당 '온고재' 대표는 "전두환·노태우 정권 당시 광주민주화운동도 사태라고 불렸다.

불행히도 인천 5·3항쟁은 정식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해 여전히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며 "언젠가 그날의 일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으면 공식 명칭이 붙여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인천시립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의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 특별전 연계 행사인 갤러리 콘서트 다섯 번째 순서이자 마지막 시간이 '인천 5·3민주화운동의 시작과 끝'을 주제로 열렸다.

이 대표는 "착취당하고 억압받았던 노동자의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가 5·3민주항쟁이었다"며 강연을 시작했다.

1986년 5월3일 낮 12시30분쯤 인천 미추홀구 주안1동 성당에서 시위대가 쏟아져 나왔다.

근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조직별로 모여 구호를 외쳤다.

동서로는 제일시장부터 석바위까지, 남북으로는 주안역부터 신기촌 사거리까지 집회가 벌어졌다.

30분여가 지나 전두환 정권의 민정당 지구당사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시민회관에서 개헌추진위원회 인천지부 결성대회를 열려던 야당 지도부는 도보행진을 포기했고, 오후 5시부터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운동권은 통일된 대오를 이루지 못했고, 시민은 주변에서 관망하고 있었다"고 이 대표는 회고했다.

급진화했고, 분열상을 드러냈으며, 야당마저 발을 들이지 못했던 이날 시위는 당시 시대적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1980년 5월 이후 최대의 시위"

이 대표는 "5·3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광주 이후 최대의 시위였으나 대중이 함께하지 못한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단일 대오가 형성되지 못한 채 과격화했다는 회상이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민주화 운동 진영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좌절이 근본적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국민에게 총칼을 겨둔 정권과 맞서려면 투철한 자기희생 정신과 이론 무장이 요구됐다.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민주화 운동도 소그룹화, 급진화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원래 1986년 5월3일 인천 시민회관에선 신민당(신한민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가 예고돼 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주축으로 1985년 창당된 신민당은 그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내걸고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이 대표는 당시 신민당의 행보가 '이중적'이었다고 규정했다. 인천 결성대회를 코앞에 둔 1986년 4월30일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국회 일정에 합의하면 '임기 내 개헌'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약속했다.

그러면서 "소수이겠지만 좌익 학생들을 단호히 다스려야 하며 민주화 운동에 이런 사람들이 끼어선 안 된다"며 탄압에 묵인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신민당에 대한 분노는 들끓었고, 민주화 운동 단체였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 "보수 대야합의 전조"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인천 5·3은 6월항쟁 디딤돌"

광주민주화운동의 좌절은 학생과 뿔뿔이 흩어진 시민만으로 전두환 정권을 타도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런 인식은 운동권에도 변화를 줬다고 이 대표는 떠올렸다.

그는 "노동자 조직이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작업장에 모여 있고, 공단 주변에 살았던 노동자는 조직화가 유리한 동시에 밑바닥에서 탄압받는 계급이자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가 가장 강했던 집단"이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노동 현장으로 향했다.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적 의미를 갖는 투쟁도 강조됐다.

1985년 서울 구로동맹파업은 신호탄과 같았다.

대우어패럴 파업으로 시작해 다른 사업장 연대 투쟁으로 번진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으로 정치 투쟁 성격을 지녔다고 이 대표는 설명했다.

정치 투쟁을 전면에 내세운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결성은 곧바로 인천에 영향을 미쳤다.

서울과 가깝고, 공장지대가 많았던 인천에서도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이 창립됐다.

서노련과 인노련이 손잡은 서인노련은 개헌 국면에서 '삼민(민중·민주·민족) 헌법론'을 주창하며 정치 조직화로 나아갔다.

1986년 5월 인천은 민주화 운동권과 야당의 균열, 학생들의 분노,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정치 투쟁이 얽힌 축소판이었다.

분열됐지만 그만큼 뜨거웠고, 과격했지만 철저한 희생정신과 시대적 고민을 담고 있었던 민주화 현장이었다.

5·3항쟁의 한계는 민주화 운동 진영의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자기만이 옳다는 태도에서 벗어나자는 인식이 쌓였고, 작은 차이보다 큰 목표에 충실하자는 단결론이 떠올랐다. 국민 대중과 함께하는 '대중투쟁론'도 대세를 이뤘다.

이런 반성 위에서 이듬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6월항쟁이 벌어졌다.

이 대표는 "민주화 운동 진영이 5·3항쟁을 통해 내부 반성과 변화를 이루지 못했으면 6월항쟁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인천 5·3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항쟁의 디딤돌이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그날의 일은 5·3사태가 아니다. 5·3민주화운동이다"라고 말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5·3 민주화운동은…광주 5·18 이후 최대 시위

1986년 5월3일 오후 2시 인천시민회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신한민주당(신민당)의 '헌법개정추진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에 1만여명의 시민·학생·노동자가 모여 "전두환 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인 민주화운동.

이날 시위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최대의 시위였다.

현장에서 연행된 시위대 가운데 129명이 소요죄로 구속됐고, 60여명이 지명수배됐다.

인천 5·3민주화운동은 이듬해인 1987년 6월항쟁으로 가는 디딤돌이 됐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

▲이우재 대표는…인천 민주화운동 산증인

▲ 이우재 대표
▲ 이우재 대표

이우재 인문학 서당 '온고재' 대표는 제물포고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

지난해 발간된 '인천민주화운동사' 편찬위원장을 맡았다.

저서로는 <이우재의 논어읽기>, <이우재의 맹자읽기>, <공자, 인간의 길을 묻다> 등이 있다.

이 대표는 민주화 운동으로 세 차례 옥고를 치렀다.

지금은 인천에서 인문학 서당 '온고재'를 운영하며 고전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이순민 기자 smlee@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