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거라 인천아/이별 후에도 벚꽃은 무사히 피어나렴/머나먼 고향에서 쓸쓸한 밤에는/꿈에도 울리겠지 월미도야/기차는 떠나가고 항구는 희미한데/이제 이별의 눈물로 외치나니/뜨거운 인사를 받아줘요/그대여 고마웠어요 부디 안녕!”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1945년 8월15일 조선 해방으로 떠나기 직전 읊조렸던 노래다. 일본인 상조회가 2차대전 때 불렀던 일본군가 '잘 있거라 라바울'의 곡조에 가사만 바꿨다고 한다. 인천이란 도시를 기획했던 일본인들이 어떠한 심정을 갖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보가 기획한 '개항 140년 다시 깨어나는 인천'에선 1883년 개항과 함께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1945년 일제 패망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냈다. 개항 후 일본은 인천을 빠르게 잠식해 정치와 경제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그들은 해를 거듭하며 '소일본화'하는 인천을 바라보며 꽤 만족한 듯싶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개항장 외곽으로 내몰며 제물포에 '일본 풍경'을 덧씌우는 데 주력했다.
일본이 인천 개항을 요구한 이유론 지리적 이점을 들 수 있다. 단지 조선을 지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계항으로서 만주를 비롯한 청의 북쪽 무역을 주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작은 일본'을 만드는 꿈을 실현할 곳으로 인천을 택했다고 한다. 아직도 인천에 일부 남은 무역의 4대 기관인 금융·운수·보험·창고가 잘 말해준다. 아무튼 일제는 인천에 그들의 상공업을 발달시키는 데 갖은 힘을 쏟아부었다.
인천은 일본 말고도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며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도시로도 유명하다. 서울과 인접한 관계로 일본인은 물론 청나라인과 서양인 등 많은 국적의 외국인 왕래가 잦았다. 1910년 인천부 인구 분포에서 한국인 1만4820명, 일본인 1만3315명, 청국인 2806명, 서양인 70명 등만 봐도 그렇다. 지금도 개항장 인근엔 차이나타운·적산가옥·구한말 서양식 건축물 등이 더러 남아 있다. 인천항을 통해 국내에서 가장 먼저 서구 문물이 대거 들어와 인천을 아름답게 꾸민 까닭이기도 하다.
당시 인천의 화려함은 대단했다고 알려진다. 인천에 한 번이라도 가 보지 못한 이들을 '촌놈'으로 취급하고, 수학여행 장소로 꼽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상징성을 알 만하겠다. 결국 우리 손으로 해내지 못한 개항이었어도, 오늘의 인천을 있게 한 개항이기도 해 뜻을 더한다. 이제 인천 개항 140년을 맞아 그 여정을 되짚어 보는 일은 시의적절하다. 아픈 역사와 번영의 길을 더불어 기록하고, 앞으로 인천이 나아갈 희망의 의미를 찾았으면 한다.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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