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언론 소명 되새기며 대중일보 뿌리 지켜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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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구입한 초고속 윤전기에서 신문이 제작되고 있다.
▲ 대중일보가 발행한 마라톤우승 호외.

▲우리나라 언론의 길을 연 한성순보
이 땅의 언론사는 1883년 10월31일 '박문국(博文局)'이 발행한 '한성순보(漢城旬報)'에서부터 시작됐다. '서울에서 10일마다 알리는 새 소식'이란 뜻을 지닌 제호 밑에는 '조선 개국 492년 계미 10월 초1일'이라는 자주적 연호를 당당히 사용해 눈길을 모았다.
창간사는 외보(外報)와 국내의 일을 나라 안에 알리고 동시에 견문을 넓게 하고, 여러 가지 의문점을 풀어주며 상리(商利)에도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했다. 이 같은 취지는 근대 언론사를 장식한 1885년의 '한성주보', 1896년의 독립신문, 1989년의 협성회 회보, 매일신문, 황성신문 등에 이르기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개항장 인천은 이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인천에 '언론문화'를 접하게 한 한성주보
한성순보에 비해 한성주보(漢城週報)는 국한문 혼용으로 표기해 독자들에게 한 발 더 다가서는 한편 발행을 주 1회로 늘린 혁신적 체제였다. 특히 신문 사상 최초의 광고(廣告)를 실었다는 것은 인천 지역의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주요한 대목이었다.
1886년 1월19일 주보 제4호에 게재된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 世昌洋行 告白)'이라는 광고는 당시 제일 큰 외국무역회사인 '마이어 상사(Edward Meyer & Co. 한자 이름 '世昌洋行')가 낸 것인데, 개항장 인천은 그로써 근대문화의 세례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무렵 인천 지역에서 경제적인 거점 마련과 상업적 이익을 취하고자 한 것은 독일만이 아니었다. 강화도조약 이후 몰려든 일본인들도 경제 침탈을 위한 여러 활동을 벌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1890년 1월28일 '인천경성격주상보(仁川京城隔週商報)'를 발행한 것이다.
이 상보는 인천에서 발행된 최초의 근대적 신문 형태로 기록되지만, 우리 언론사의 한 축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일본의 해외 언론사의 일부분에 해당될 터이다. 상보 이후 부침을 거듭한 인천 지역의 일본계 신문들은 조선순보(1891년), 조선신보(1892년), 신조선(1894년), 조선타임즈(1907년), 조선신문(1908년), 대한일보(1903년), 인천상보(1903년), 인천신보(1921년) 등이다.

▲진정한 지역 언론사, '대중일보(大衆日報)'가 열어
이들은 모두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제작한 식민지 현지의 어용지(御用紙)들이었다. 통감부나 총독부의 지시 없이는 발행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으며, 간혹 국문(國文)을 일문(日文)과 혼용해 발행했다고는 하나 그 역시 식민 통치를 위한 수단의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언론을 출범시킨 것은 자본주 고주철(高珠澈), 편집인 최상철(崔相哲), 부사장 송수안(宋壽安), 인쇄인 이종윤(李種潤) 등 인천의 명망가들이었다. 그들은 광복이 되자 지역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의기투합해 1945년 10월7일 마침내 순국문판 일간지 '대중일보'를 창간시켰다. 대중일보는 발행지를 인천시 궁정 2번지(宮町 지금의 중구 신생동)로 밝혀 '인천(仁川)'의 언론임을 내외에 천명했다. '인천시(仁川市)'는 광복 후 한동안 '경기도'에 속해 있었으나 도내의 주요 관공서는 대부분 인천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도청 소재지인 수원시에는 신문사가 단 한 곳도 없는 실정이었다.
대중일보 창간 후 인천에서는 1946년 3월 손계언(孫啓彦)이 인천신문(6·25전쟁 중 폐간)을 창간했고, 전시 중인 1951년 말 전시판 대한일보(사장 심영섭)가 2년가량 발행했으며, 1952년 8월에는 김병윤(金秉胤)이 구(舊) 인천일보(1961년 5월 시설 미비로 자진 폐간) 등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후 1960년 허합이 구(舊) 인천신문을 창간했는데, 이 신문은 1968년 경기연합일보로 개제한 직후 수재의연금 횡령혐의 등으로 분란을 겪다가 언론 불모지였던 경기도 수원시로 이전했고, 1970년 연합신문으로 개재해 발행을 계속해 왔다. 인천의 언론사가 수원으로 이전해 가 경기도에 언론의 씨를 뿌렸던 셈이다.

▲군부, 도내 제1의 '경기매일신문' 강제 통합
대중일보로 시작된 인천의 언론은 1973년 9월1일 결코 잊지 못할 사상 초유의 공백 사태를 맞았다. 당시 군부 정권은 군소 언론사의 난립과 폐해를 핑계 삼아 소위 '1도1사 원칙'을 세우고 그를 무리하게 강행했다. 그로 인해 경기도 내에서 사세가 가장 탄탄했던 인천의 경기매일신문사(京畿每日新聞社)가 1966년 2월 창간한 경기일보(京畿日報)와 함께 가장 사세가 제일 약했던 수원 소재 '연합신문(聯合新聞)'으로 강제 통합됐던 것은 상식을 벗어난 폭거였다.
연합신문은 인천의 두 신문사를 통폐합한 직후인 1973년 9월1일 경기신문(京畿新聞)으로 제호를 바꾸었고, 1982년 3월1일 경인일보(京仁日報)로 제호를 변경했는데, 인천시 중구 항동 소재 옛 인천곡물협회 건물에 인천분실(仁川分室)을 두고 있었다.
인천지역의 일부 언론인들은 하루아침에 통폐합이라는 날벼락을 맞아 실직자가 됐다. 그러나 인천 사람들은 그로부터 시작된 15년간의 언론 공백 사태를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천상공회의소는 자체 발행 '인천상의보(仁川商議報)'에 오종원(吳種元) 경기매일신문 편집부국장과 김경하 기자, 경기일보 정진철 기자 등을 기용해 언론의 맥을 살려 나갔고, 전 신아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했던 김경룡(金慶龍) 선생과 서강훈(徐康勳) 회장 등은 특수주간지 '경기교육신보(京畿敎育新報)'를 발행해 훗날 창간한 '기호일보(畿湖日報)'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다.

▲'대중일보'뿌리를 지켜낸 인천의 언론인들
1945년 10월7일 순국문판 일간지로 창간한 대중일보는 어느 모로 보나 인천 사람들이 만든 자랑스러운 지역지였다. 1950년 9월19일 송수안 사장이 제호를 '인천신보(仁川新報)'로 개재한 것은 참혹한 전쟁 중에도 지역에 착실히 뿌리를 내리고자 한 의욕의 결과라 하겠다.
1957년 7월 제호를 다시 구(舊) '기호일보(畿湖日報)'로 바꾼 것은 보급망을 충정 지역까지 확장해 보려는 시도였으며, 1960년 7월 '경기매일신문(京畿每日新聞)'으로 개정한 것은 과도한 사세 확장보다는 견실한 지역지가 되고자 한 몸부림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천'이 '경기도'에 속했던 시절에 내릴 수 있었던 용단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오늘날 인천광역시와 경기도 소재 여러 지역지들이 두 지역을 힘겹게 포용하고 있는 단초가 된 현상이었는데, 1988년 노태우 정권의 6·29선언으로 강제 통합됐던 인천의 언론인들과 주주(株主)들이 대중일보가 씨를 뿌린 지역 언론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분리 독립을 선언을 한 것은 보기 드문 애향심의 발로였다고 보인다.
어느 시대나 신문은 특정 정권의 나팔수가 아니며, 그렇다고 주주만의 것도 아니요, 기자만의 장도 아니다. 신문은 양자를 포함한 온 시민에게 위임받은 알권리를 수행하는 시민의 숭고한 언로(言路)의 광장인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언론 자유화의 물결에 올라탄 옛 경기매일신문사, 경기일보의 소속 주주들과 양사 출신 기자들이 의기투합해 1988년 7월15일 어렵사리 탄생시킨 인천일보는 지역 언론인의 뜨거운 각성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강제 통폐합될 때의 경기매일신문사 오종원 편집부국장이 인천일보의 초대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것은 대중일보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한 인천지역 언론인들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선택이었으며, 문병하 사장, 오광철 주필, 유덕택 전무, 김진모 상무, 김정기 국장 등 운영진들과 상당수의 간부급 기자들이 인천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인천일보가 진정한 인천의 지역지임을 자임한 사례라고 할 것이다.

▲'대중일보' 전통 살려나가야 할 '인천일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1988년 창간 당시 선배 언론인들이 대중일보-인천신보-(구)기호일보-경기매일신문으로 이어지는 지역 언론의 역사적 선상에 자신들이 서 있음을 통렬히 자각하고, 신문의 제호를 과감하게 '경기매일신문' 혹은 '대중일보'로 계승하지 못했던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런 점에서 그간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 출신 김형희 선생, 경기일보 편집기자 출신 오세태 선생, 인천언론사를 편찬한 송수남 선생, 그리고 그 후배들인 이훈기 OBS TV 노조위원장, 김진국 인천일보 논설위원, 이희환 문학평론가 등 여러분들이 밝혀 온 대중일보에 관련한 생생한 진술들을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오늘 창간 30주년을 맞은 인천일보의 여정은 문자 그대로 형극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 고초 속에서도 광복 이후 지역 언론인들이 지켜온 '대중일보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임직원들의 열기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해 있음을 목도하면서 인천일보의 50년, 100년의 건승을 간절히 기원한다. "언론이 바로 서야 지역이 산다"는 경구를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시점에서 창간(創刊) 사원의 한 사람으로서 인천일보의 사시(社是)를 또렷이 떠올려본다. "애향심 고취(愛鄕心 鼓吹), 불편부당(不偏不黨), 공명정대(公明正大)". 이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우리 인천·경기 언론인들이 지켜나가야 할 목숨과도 같은 가치이기도 하다.

글 사진 / 조우성 전 인천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