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구 인천시의원
▲ 황흥구 인천시의원

며칠 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수인선 1960'이라는 사진전을 관람했다. 지난달 27일 수인선 인천구간 개통기념으로 기획 전시된 '김용수' 향토원로 사진작가의 1960년대 수인선과 얽힌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촬영한 사진전이다. 불과 50여 년 전의 풍경들인데도 흑백사진 때문이었는지 마치 개화기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역사내부의 수동식회전 전화기와 신호기, 만원열차 안에서 할아버지가 천장손잡이에 지팡이를 건 것을 함께 잡고 있는 어린아이의 앙증맞은 손, 복잡한 열차 간에서 쌀을 바닥에 펴놓고 여럿이 둘러앉아 뉘를 골라내는 동행의 아낙네들, 역 구내에서 더위와 피곤에 지쳐 바닥에 모로 누워 자는 엄마의 허리에 올라타 환하게 웃고 있는 철부지. 한 컷 한 컷마다 한숨과 시름이 배어 나오지만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삶의 의지와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사진들을 보노라니 과거에 머물던 추억이 정겹게 다가왔다.

필자는 수인선 열차를 어려서부터 보고 자랐다. 호구포쪽의 초등학교를 가려면 반드시 철로를 건너 다녀야만 했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이면 친구들과 큰 대못을 철로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납작하게 칼 모양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를 대고 있으면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영롱하게 귓전을 때리기도 했다.

그리고 학창시절에는 줄곧 수인선 기차를 타고 통학했다. 한국화약 공장이 있는 '고잔동'에서 기차를 타려면 '소래역'이나 '남동역'에 가야 탈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쯤 때인가 그 중간에 간이역이 새로 생겼다. 역 명칭도 없고 역사도 없는 허허벌판에 논현 범아가리나 고잔 학생들을 위해 생긴 역이었다.

기차가 도착하면 학생들이 다 탈 때까지 멈춰 서고 난간에 올라탄 역무원이 빨간 깃발을 흔들어야 기차는 떠났다. 석탄으로 가는 이 증기기관차는 소금을 실은 화물차까지 달고 다니기 때문에 언덕을 오를 때는 마치 무거운 짐을 진 황소가 힝힝거리며 힘겨워 하듯 맥없이 흰 연기만 내뿜으며 칙칙폭폭 기적소리만 요란했다. 기차통학을 하려면 한 달치 승차권을 끊고 다녀야만 한다.

그러나 가끔은 돈을 다른데 써 버리고 무임승차로 다닌 적도 있다. 탈 때는 간이역에서 타기 때문에 괜찮지만 내릴 때가 문제다. 가끔 열차 내에서 승차권 소지검사를 하는데 이땐 무슨 007영화를 방불케 하듯 역무원을 피해 화장실에 숨기도 하고 의자에 마음 편히 앉지도 못하고 항상 난간에 매달려 불안에 시달려만 했다.

더 위험한 것은 종착역에 도착하기 전에 기회를 봐서 뛰어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공수부대원들이 낙하산 훈련하듯 여러 명이 한꺼번에 난간에서 뛰어내리는데 한번은 책가방을 놓쳐버려 책은 책대로, 도시락까지 날아가 버린 일도 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옷이 찢어지는 것은 물론 땅바닥에 뒹굴어 무르팍이지 깨지기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기 그지없다.

지금은 지하로 다녀 밖을 내다볼 수는 없지만 종착역이었던 '수인역'으로 불려졌던 '남인천역'의 모습도 아련하다. 역사 뒤쪽으로는 밀물 때가 되면 바닷물이 그 밑까지 차오르고 역사 앞 비포장 광장에는 항상 멀리 '군자', '야목', '일리' 등지에서 온 시골 아낙네들이 저녁햇살을 받으며 좁쌀, 수수, 강낭콩 등의 농산물과 한쪽에서는 금방 잡아온 맛살, 조개, 굴 등을 한 사발씩 까놓고 팔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43년 만에 인천구간이 재개통됐다고 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내년이면 전 구간이 온전히 연결되고, 이 수인선을 통해 앞으로 부산까지 내려가는 KTX열차를 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서민들의 애환을 실어 나르던 수인선이 앞으로는 인천의 꿈과 희망을 싣고 다니는 보배로 태어나길 기대해 본다. /황흥구 인천시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