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종구
▲ 배우 윤종구

연극은 소멸의 미학이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자료가 남지 않습니다. 누군가 연극 실황을 촬영해서 자료로 남긴다 한들 그 순간의 살아있는 뜨거움을 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연극은 인생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공연은 매번 같은 공연을 하지만 매번 같은 공연이 아닙니다. 그날그날 배우들이 서로 주고받는 에너지가 다르고 찾아주시는 관객분들이 다르니 매번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배우들은 그날의 공연이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무대 위에서 열정과 혼을 불사르게 됩니다.

어릴 때는 누군가 왜 연극을 하냐 왜 배우를 하냐고 물어오면 "좋아서"가 제일 먼저였습니다. 지금은 좋아서라는 말보다 "사명감"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게 됩니다. 일상에서 자주 접하지 않을 치열한 갈등의 연속속에서 벌어지는 웃음과 눈물 그리고 그 순간 찾아드는 감동을 명확히 관객분들에게 전해드리겠다는 사명감으로 오늘도 무대에 섭니다.

공연이 끝났습니다. 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무대와 텅 빈 객석을 지나 극장을 나섭니다. 극장과 집까지의 거리는 배역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나로 돌아가는 시간을 제공합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저는 공연이 끝나면 배역을 털어내고 집으로 가는 게 현실의 저에 대한 예의라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극장으로 갈 때는 현실속의 나를 덜어내고 배역을 입고 가야한다는 게 관객분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타인과 나에 대한 예의는 결국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연극배우는 인간을 연구하는 직업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애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또한 연극에서 가장 중요시 생각하는 것은 시대성입니다. 현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거나 부조리한 현상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행위가 연극의 시대성입니다.

고전을 하더라도 왜 고전을 지금 이 시점에 해야 하는가에 방점이 찍혀야 합니다. 시대를 들여다보는 행위는 별게 아닙니다.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결국 연극의 출발이 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하게 태어납니다. 때문에 불공평은 참지만 불합리는 참지 말아야 한다고 누군가 그랬습니다.

곳곳에서 불합리가 판을 칩니다. 연극소재가 넘쳐납니다. 연극은 차라리 현실보다 덜 불합리합니다. 그것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정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명감 있는 정치인들을 찾는 게 어려워졌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이제 그들에게 요구하지도 못하겠습니다.

거리 곳곳에 분노의 기운이 넘실대는데 여전히 "잘 살아보세"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정상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저처럼 분노하고 거리로 뛰쳐 나가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을 누군가는 '테러리스트'라고 합니다. 엄밀히 정의한다면 그들은 집회참여자입니다. 그런데 뉴스는 어감부터 불온하게 느껴지는 '시위대'라는 표현을 하고 편집도 거기에 걸맞게 폭력적인 모습만을 반복해댑니다.

제 눈에는 물대포를 쏘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경찰들이 더욱 폭력적이고 불온하게 보이는데 말입니다. 더 이상 공중파 뉴스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집회참여자들이 마스크를 썼다고 테러리스트라 말합니다. 아니 그럼 침묵시위 하려고 마스크를 착용해도 테러리스트가 되는 건지 되묻고 싶습니다.

저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에 대해 격하게 반대합니다. 그러나 다른 목적으로 한 개인을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테러리스트로 몰아 부친다면 저는 더더욱 격하게 반대할 것입니다. 불합리한 것에 손을 들어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말해온 저로서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저는 인본주의자인데 이제는 테러분자로 낙인찍힐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선은 거리로 나가더라도 마스크는 쓰지 않으렵니다. 우리나라에선 마스크를 쓰면 테러리스트가 되니 말입니다.

많이 써먹은 상투적인 표현을 '우리쉐'라고 하는데 제가 참으로 클리쉐한 글 하나를 올리며 마무리하렵니다. "봄비가 내렸는데도 꽃은 아직 피지 않았습니다. 꽃은 피지 않아도 봄은 옵니다. 그러나 저에게 봄은 꽃이 피어야 봄입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꽃피는 봄은 오고야 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