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숙박 열악' 관광객 난감 … 섬 여행 한번가기 힘든 시절
덕적도 서포리 객선부두서 3시간 걸려 … 여관 등 시설도 협소
유일 관광지 '작약도' 성수기 14만여명 방문불구 해수욕장 無
▲ 1981년 연안부두에서 을왕리로 가는 관광5호 여객선을 타는 피서객들. 숙박시설이 부족해 야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들 짐을 많이 들었다. (박근원 사진)

이번 주부터 여름휴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68개의 섬을 보유하고 있는 인천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있다.

섬으로 바캉스를 떠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육지에 딸린 해수욕장에 비해서 접근하기가 불편했고 숙박, 놀이 시설 등이 제대로 갖춰 있지 않았기 때문에 피서지로 선택받지 못했다.

1960년대 초 만해도 가까운 영종도조차 격일제로 여객선이 운행되었기 때문에 섬 기행은 '고행' 그 자체였다.

노송을 배경으로 고운 모래밭이 2㎞나 펼쳐져 '서해의 명사십리'라고 일컬었던 덕적도 서포리는 인천역 뒤쪽에 있던 객선부두에서 출발해 3시간이나 걸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6·70년대 수도권 관광지의 '지존'으로 늘 꼽혔던 곳이지만 시설은 열악했다. 1969년 여름 당시 여관 5개, 여인숙 10개, 방가로 3개(객실 26개), 야영천막 50개 그리고 해변 바로 뒤 민박 등이 숙박 시설의 전부였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를 받아 상수도 시설이 돼있고 해변에 백열등이 켜있다는 것이 '자랑거리'였을 정도다. 이로 인해 당일치기 섬이 인기였다.

옹진군과 강화군이 편입되기 전 인천시의 유일한 섬 관광지였던 작약도는 70년대 하루 평균 5000여명, 여름철 성수기에는 14만 5000명이 방문할 정도였다.

연안부두에서 보트급의 소형 선박 7척이 수시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섬임에도 불구하고 해수욕장이 없었고 숙박시설로는 작은 여인숙 하나만 있어 피서지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은 선사를 통해서 단체로만 갈 수 있는 팔미도는 70년대 말 까지 연안부두에서 하루 3, 4회 배가 운항되었다.

서해 연안에서 가장 물이 맑다는 평가로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섬이다. 이즈음 인천 앞바다 섬에 새로운 해수욕장들이 개발되었다.

1970년 7월 새한상사㈜가 북도면 시도에 둑을 쌓고 보트, 천막 등의 시설을 갖추고 해수욕장을 처음 개장했다. 하인천 객선부두에서 매 시간 마다 쾌속정 5척이 왕복 운행했다. 왕복 배 삯은 입장료 포함해서 당시로서는 매우 비싼 400원이었다.

개인 소유였던 사승봉도도 74년 6월에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8노트 정도의 철선이 연안부두에서 출발해 이작도에 도착한 후 승봉도 행정선으로 다시 옮겨 타야 도착할 수 있었다.

80년대 접어들면서 섬으로 가는 교통과 숙박 시설이 개선되자 여름 휴가철이 되면 인천 연안부두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한 예약시스템이 돼 있지 않아 무작정 여객터미널로 달려가야 했다. 배표를 손에 쥐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음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서너 배, 심한 경우 열 배가 넘는 암표를 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날씨가 따라줘야 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날씨가 나쁘면 여행을 포기하거나 주변에서 운항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노숙하며 밥해 먹는 여행객들의 모습은 휴가철 여객선 부두 주변에서 빠질 수 없는 풍경 중 하나였다. 주머니가 얇은 학생들은 주로 야영을 했다.

미군이 야전에서 사용하던 군수품을 개조해 만든 텐트, 코펠, 버너, 침낭 등 캠핑 장비를 갖춰 가야 했다. 무엇보다도 섬에서도 귀한 양식(쌀)은 꼭 챙겨가야 할 필수 품목이었기 때문에 여행 짐은 언제나 산더미였다. 이런 모습으로 서너 명만 줄을 서도 마치 피난 행렬을 연상케 했다.

육지로 귀환할 때 다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왕복권을 발매하지 않는 섬으로 여행을 가는 경우 다시 배표를 구하기 위해 일행 중 한명은 휴가를 포기하고 선착장에 아예 나가 있어야 했다.

간혹 일기가 불순해 운항이 건너뛴 경우 귀향객들로 선착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어떻게든 휴가 복귀 기간을 맞춰야했던 직장인이 고깃배를 전세 내 육지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고 있다.  /유동현 인천시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