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솔 누비던 수영복 차림의 사서...70년대 유명 해수욕장선 흔한 풍경
▲ 예전 피서지의 익숙한 풍경 '임해문고'는 우리나라 최초로 1947년 월미도해수욕장에 개설되었다. 사진은 1986년 송도해수욕장의 임해문고 모습이다.

'임해(臨海)'라는 단어는 이제 거의 사어(死語)처럼 되었다. 한때 '바다에 가까이 있다'라는 의미로 임해공업단지, 임해관광, 임해도로 등은 흔하게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임해도시' 인천에서 매년 8월 중순 바다를 테마로 개최되는 '전국임해사진촬영대회'는 1956년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대표 여름철 사진축제 중 하나이다.

'임해문고(臨海文庫)'는 여름철이 되면 바닷가 피서지에 임시로 개설되는 이동도서관이다. 우리나라의 임해문고는 인천 바닷가에서 처음 개설되었다.

1947년 여름, 국립중앙도서관은 휴가철을 맞아 바닷가를 찾는 피서객들에게 책을 쉽고 편하게 제공하기 위해 인천부립도서관과 함께 월미도해수욕장에 '임해문고'를 설치해 운영했다.

경향신문은 8월31일자에 이를 보도했다. "국립도서관에서는 인천 월미도해수욕장 캠프촌에 8월23일부터 9월5일까지 2주일 동안 임해문고를 개설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독서가에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시행 첫해 임해문고의 개설 일자가 피서철과 맞지 않아 호응이 낮았는지 이듬해 1948년에는 여름바닷가 성수기인 7월21일부터 8월25일로 조정해서 개설했고 1949년은 아예 7월1일부터 8월20일까지 기간을 더 확대했다.

1950년 이 땅에는 여름 바닷가가 없었다. 6·25 전쟁으로 한참 동안 임해문고는 개설되지 못했다. 1967년이 되서야 국립중앙도서관은 변산해수욕장에 임해문고 텐트를 다시 쳤다. 그 사이 월미도해수욕장은 군 주둔과 매립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임해문고는 68년 경포대해수욕장에 들어섰고 69년 인천에 다시 송도해수욕장에 설치되었다.

이 때부터 임해문고는 여름철 해수욕장 풍경의 하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해변 한쪽에 커다란 군용 텐트를 치고 아래 부분을 걷어 올렸다. 사방이 트인 텐트 안은 시원했다.

책꽂이에는 무거운 주제의 책보다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과 시집 등이 주류를 이뤘다. 책은 신분증만 있으면 빌려주었다. 간혹 신분증이 없는 사람은 그 안에서 읽거나 돈을 맡기고 빌려가기도 했다. 독서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수영복을 입은 사서가 책 몇 권을 들고 파라솔 사이를 누비며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임해문고 설치 여부는 그 시대의 유명 해수욕장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국립중앙도서관60년사'에 의하면 1977년 임해문고가 개설된 곳은 인천송도해수욕장을 비롯해 낙산해수욕장, 포항송도해수욕장, 연포해수욕장, 만리포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 등이었다.

이들 해수욕장은 70년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던 피서지로 꼽히던 곳이었다.

사진은 1986년 송도해수욕장에 설치된 임해문고이다. 대부분 수영을 한 후 시원하게 웃통을 벗은 채 찾아와 독서삼매경에 빠진 모습이다.

입간판과 천막에 새마을 마크가 찍혀있다. 새마을운동이 1970년대 후반부터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함에 따라 농어촌 중심으로 새마을문고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임해문고 개설은 공립도서관에서 해수욕장이 속한 지역의 새마을문고 측으로 바통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즈음 '숲과 함께 하는 작은 도서관'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임간문고(林間文庫)'도 등장했다. 말 그대로 전국의 유명 계곡이나 휴양림에 개설한 이동숲속도서관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전국 유명해수욕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리지만 최근 임해문고나 임간문고의 설치는 예전만 못하다. 피서객들은 노트북이나 PDA 등 휴대용 단말기를 통해 e북을 읽거나 아예 휴대폰삼매경에 빠져서 책을 멀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 서가 깊숙이 꽂힌 책들은 모처럼의 바깥바람 쐬는 기회조차 사라지고 있다.  /유동현 인천시 '굿모닝인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