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 살리고 산화 … 호국정신 기려야
[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 창령초등학교 '강재구 소령' 흉상.

근대 개항을 전후해서 현재까지 한국사는 많은 질곡의 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신미·병인양요와 운요호사건을 비롯해서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전쟁, 민족상잔의 6·25전쟁, 베트남전 파병 그리고 최근의 북한 도발에 이르기까지 국가를 지키기 위한 희생자가 너무나 많았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나라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함으로서, 그들의 공로에 보답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퇴색해가려 하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고민할 과제이기도 하다.

베트남전쟁으로의 파병

1964년 미국은 통킹만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개입하게 되는데,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에 베트남전 지원을 호소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64년 9월 의무 요원과 태권도 교관 요원을 파견했다. 1965년의 베트남 상황은 미국의 강력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호치민 루트를 이용한 북베트남군의 남파가 계속되면서 남부의 전 지역에서 지상전이 가열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한국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해왔다.

한국 정부는 전투 병력의 증파에 앞서 한국안보와 경제발전 등 제반문제의 해결을 위한 조치를 요구하는 선행조건을 미국 정부에 제시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대외원조 삭감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던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 삭감중지와 1억5000만달러의 장기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강재구의 산화(散華)

강재구(姜在求)는 1937년 7월26일 인천 금곡리(金谷里) 54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성전기(지금의 한국전력공사) 부평지사에 다니던 강진우(姜鎭宇)로, 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44년 인천 소화동국민학교(昭和東國民學校, 지금의 부평동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48년 창영국민학교로 전학을 간 후 1950년 인천중학교에 들어갔다. 6·25전쟁을 겪고 난 후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1956년 6월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입교했고 1960년 3월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 1963년 7월 육군사관학교에 파견됐을 당시 온영순(溫榮順)과 운현궁예식장에서 육사교장 박중윤 장군의 주례하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육군 수도사단에 배속된 후, 전·후방 각 부대를 거쳐 육군 대위로 진급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이 결정되자 강재구는 1965년 8월31일 파월 맹호부대에 지원했고 맹호부대 제1연대 제3대대 제10중대장이 됐다.

부대 편성과 훈련에 동분서주하고 있던 9월 초 그는 부평에 살던 편모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부대는 건국 이래 최초의 전투부대 파병을 앞두고 국가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기에, 모친의 장례를 마친 그는 3일 만에 다시 부대에 복귀해 슬픔도 잊은 채 훈련에 열중했다.

1965년 운명의 10월4일.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홍천 부근의 맹호부대 훈련장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 중, 부하가 실수로 수류탄을 떨어뜨려 많은 부하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강재구는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치고 장렬히 산화했다.

온통 밀림인 베트남에서의 전쟁 수행을 가정할 때, 평탄한 지형에서의 훈련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군 지휘관들은 굴곡이 심한 위험지대에서 훈련을 강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이등병이 안전핀을 뺀 수류탄을 놓치고 말았고 수류탄은 100여명의 중대원이 있는 곳으로 굴러가게 됐던 것이다.

당시 이와 같은 참상(慘狀)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던 이범영(李範英) 대령의 일기에는 "오늘은 내 일생에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큰소리로 수류탄 투척 요령을 일러주시던 강재구 중대장님이 불과 몇 분도 되기 전에 부하 대원이 잘못 던진 수류탄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내 동료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려다 그만 실패하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사랑하는 부하들을 죽음으로부터 살려낸 '인간 강재구 대위님'. 나는 그 위대한 희생정신을 하늘같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희생으로 중대원들 몇 명만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을 뿐 사망자는 없었다.

영생(永生)하는 군인의 표상

영결식은 그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려 육군장으로 장례됐고 병사들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살신성인의 차원을 넘어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소령으로 특진됐고 근무공로훈장이 추서됐다.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된 최초의 사례였다. 또 그가 속했던 수도사단 제1연대 3대대는 이날로부터 '재구대대'라 명명됐고 그가 중대장을 맡았던 제3대대 제10중대는 재구중대라는 별칭을 갖게 됐다.

육군에서는 매년 희생정신의 귀감이 되는 모범 중대장을 선발해 '재구상'을 수여함으로써 고인의 뜻을 높이 추앙하고 있다.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그가 산화한 자리에는 추모탑이 세워졌고, 1978년 '강재구공원'으로 조성됐으며 1986년에는 강재구기념관을 건립했다. 그가 졸업한 서울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는 동상이 세워졌다.

매주 금요일이면 예복을 갖춰 입은 육군 사관생도들은 화랑연병장에서 한 주의 성과를 돌이켜보고 다음 한 주의 결의를 다지는 화랑의식을 실시한다.

그리고 화랑의식이 끝나면 사관생도들은 고 강재구 동상을 지나는 퍼레이드를 펼치는데, 그때 부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고 강재구 동상 앞에서 '내 생명 내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호국 충정의 의지를 결의하면서, '받들어 총', '충성'을 우렁차게 외치며 행진을 한다.

또한 매년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는 이색적인 이벤트가 펼쳐지는데 소위 계급장을 단 졸업생들이 고 강재구 소령의 동상을 향해 일제히 달려가 꽃다발을 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2015년은 강재구 소령이 산화한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자신을 희생하며 결단을 내리는 것은 평소 그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창령초등학교에도 그의 흉상이 건립돼 있고 현충시설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다는 이유로 우리의 기억 저편에서 잊혀지거나 무관심속에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닌지, 강재구 소령의 고향인 인천에서는 그를 기억하기 위해 무엇을 해왔는지,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과제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