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교육감 당선인 이청연, 그는 누구인가
▲ 이청연 인천시교육감 후보가 5일 오전 인천시 남구 자신의 선거 사무실에서 당선이 유력하다는 소식을 들은 뒤 부인 고복순씨, 지지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충남 출신 … 교직생활서 학생 소통 가장 중요시 여겨

교육현실 변화 결심 전교조 가입 … 해고 통보 받기도

2006년 교육위원 선출 … 아이들 소외·차별 해소 앞장



평소 '소신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아이들의 눈빛만 봐도, 학부모의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교육을 원하는지, 무엇을 바라는 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촌지 받지 않기 운동'을 전개했을 정도로 청렴도에도 자신있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배우고 성적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삶에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일. 이것이 바로 참 교육이라고 설명한다.

스스로를 '뜨거운 심장과 리더십을 고루 갖춘 실력파'라고 칭한다. 모두 이청연 당선자에 대한 설명이다.

이청연 당선인은 "우리 인천 아이들이 자유롭게 높이 나는 연처럼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교육정책을 펴겠다"며 입을 열었다.


▲교단에 서는 꿈을 확립하다

이청연 당선인은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난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학생이었다.

이 당선인의 교육을 향한 열정과 교사로서의 꿈은 6학년 때 시작 됐다. 수업은 물론, 수업 외에도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온 열정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님의 모습은 이 당선인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장래희망을 확립한 그는 없는 살림에도 중학교 진학을 위해 강원도 홍성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를 대신한 큰 형의 지원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한 이 당선인은 교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재수 끝에 인천교육대학교(현 경인교대)에 진학, 파란만장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교직 첫 시작부터 '삐그덕', 하지만 학생들과 소통을 계속이어가다

이 당선인의 교직생활을 첫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또 교사 적체 현상으로 교대를 졸업했지만 발령을 받지 못한 것이다. 결국 졸업 후 1년 반이 지난 1976년 6월에야 첫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경기도 연천 농촌마을에 위치한 노곡국민학교로 첫 발령을 받은 그는 예상과는 다른 학교의 군대식문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문화를 바꿔야 겠다'는 생각보다는 학교는 '원래 그런 곳인가 보다'는 생각이 컸다고 회상했다.

군대식 보수적 문화를 바꾸지는 못해도 담당하는 학생들과 소통은 계속했다.

지금 이 당선인의 소통을 중요시 하는 습관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교직에 있던 기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진행했던 학급문집 만들기, 어린이날 편지쓰기 같은 것은 교직생활 초기에 시작한 일들이다.


▲교육을 바꾸기 위해, 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전교조에 들어가다

당시 교육현장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목격할 기회는 정말 뜻하지 않게, 사소한 계기를 통해 찾아왔다.

1980년대 후반. 어느 날 함께 교직생활을 하던 후배 교사의 "뜻 있는 교사들이 모여 교육현실을 논하는 자리가 있다"는 권유로 주안5동 성당을 찾았다.

그날 이후 이 당선인은 학교현장을 바꾸기 위해서는 직접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타인의 손을 빌리기보다는 직접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후 1989년 교육현장의 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전교조가 설립되자 그는 주저없이 가입했다.

앞서 말한 본인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교육의 근본적 문제를 바꾸는 일은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99년 학교에서 해고된 것이다.

학교에서 해직당한 후 4년을 거리의 교사로 살았다. 하지만 그때에도 이 당선자에게는 변하지 않는 신념이 있었다.

언젠가는 전교조가 학교를 바꾸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절대 버리지 않았다.

그 믿음의 결실로 2001년에는 전교조 인천지부장직을 맡았고, 교육위원에 출마하기 위해 교단을 떠나기 전까지 전교조는 항상 그의 활동의 뿌리이자 전환점이었다.


▲다시 한번 그에게 도전과 결단의 시기가 왔다

단순히 교실에서 일으키는 미약한 바람만으로는 학교의 변화가 힘들다는 것은 너무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 당선인은 2006년, 결국 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현실 앞에 놓인 거대한 벽을 한번 넘어보자고 결심했다.

그는 그가 교직생활을 했던 남동구와 연수구 학생들의 학부모들의 뜻을 모아 교육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교육위원 의정활동은 하루하루가 희망과 좌절의 롤러코스터와 같았다고 이 당선인은 회상했다.

교육위원은 전교조 활동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 현실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가는 균형있는 사고가 요구되는 자리였다.

교육위원 활동 중 가장 뜻 깊었던 일을 하나 꼽으라면 그는 주저 없이 한센병 환자 2, 3세 자녀들에 대한 '미감아(未感兒)' 낙인을 없앤 것을 꼽는다.

한센병 환자의 자녀들에 대한 편견으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지켰다.

교육비리를 파헤치고 바로잡는 것도 교육위원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였다.

공무원 자녀들이 다니는 병설유치원의 급식 비리를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해당 유치원은 감사를 받았고, 그 결과 시설장이 해임되었다.

교육위원 활동은 이처럼 소외되고 차별받는 아이들, 한명의 아이들도 놓치지 않는 교육을 위해 제도와 정책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자원봉사센터, 경험의 폭을 확대하다

전교조를 만난 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면, 인천광역시 자원봉사센터 소장으로의 경험은 그의 교육에 대한 신념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 2010년 교육감 선거에서 0.3%p라는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 직후의 일이다.

교사, 전교조 활동이 교육현장을 제대로 알게 했고, 교육위원 활동이 그 현장의 밑에서 벌어지는 구조의 문제를 파고들게 했다면, 자원봉사센터 활동은 지금까지의 경험의 폭을 확대하는 새로운 세계였다.

자원봉사는 원래는 시청, 교육청, 구청이 감당해야 하는 공공의 책임 영역에서 나타나는 공백을 민간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매우는 것이다.

그만큼 공공기관들이 무엇을 잘 못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무언가 하려고 하는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 잠재된 힘들과 만날 수 있는 경험이자 교육자로서 만나기 쉽지 않은 소중한 기회였다.

어렵고 소외된 시민들에게 어떤 교육적 지원이 필요한지, 교육정책과 행정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지역사회와 학교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해 준 값진 경험이었다고 강조했다.

바닥에서 험란한 길을 해쳐온 이 당선자. 이제는 인천 교육을 바꿀 일만 남았다. 혼자서는 힘들지만 여럿이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 당선인은 모든 것을 바꿀 준비가 돼있다.

/김상우·김근영 기자 theexodus@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