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10. 한국미술사 연구에 첫걸음을 내딛다
   
▲ 개성부립박물관 전경, 1930년대


1933년 조선상인 영향력 강한

개성지역 개성박물관장 부임


마침내 연구 활용기회 찾아와



'고려시보'에 유적·유물 소개

사후 단행본 '송도고적' 펴내

'개성학'의 탄탄한 기틀 마련




우현 고유섭은 1933년 4월 1일 오랫동안 공석으로 있었던 개성부립박물관의 관장으로 부임했다.

원래 개성박물관은 일제 치하였던 1931년 11월 1일 새로운 부제(府制)의 실시에 의해 개성군(開城郡) 송도면(松都面)이 개성부(開城府)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초대 부윤(府尹)이던 김병태(金秉泰)의 주선과 지방유지 및 부민(府民)들의 협조로 자남산(子男山) 남쪽에 터를 잡아 건립되었다.

우현과 경성제대 예과 2회 동기생인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과 우현의 제자이자 훗날 잠시 개성박물관 관장을 지내기도 했던 미술사가 진홍섭(秦弘燮)의 회고에 따르면, 개성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까다로운 지방이었다.

당시 다른 지역의 경우 총독부 산하 모든 기관의 수장(首長)을 일본인들이 도맡아 차지하는 형편이었으나 이 개성지방만은 마음대로 하지 못해 부윤을 비롯한 모든 기관의 장, 즉 개성전기회사(開城電氣會社),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의 지점 등은 개성인이 주축이 되어야만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개성상인들은 일체 거래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성박물관장의 자리를 일본인이 차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우현 형이 그 물망에 오르게 되었고 뒤미쳐 임명, 부임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현으로 하여금 자기가 다년간 닦아온 학문을 실지(實地)에 활용할 기회를 얻게 하여 그 후 많은 지역을 관비(官費)로 탐방ㆍ답사하여 우리 고대미술의 진상(眞相)을 천명(闡明)하고 우리 고고학의 토대를 구축(構築)하는 데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특히 우리 탑파(塔婆)의 연구 같은 것은 형의 업적 중의 특기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희승,「又玄 형의 추억」,『考古美術』123·4호(우현 고유섭 선생 삼십 주기 기념 특집호), 1974년 12월>

여기에 덧붙여 경성제대 미학연구실의 동료였던 나카기리 이사오(中吉功)의 우현에 대한 추억 속에서도 우현의 개성부립박물관장의 부임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이보다 앞서 개성부립박물관의 초대관장인 김씨(金氏)가 사임하고 당분간 관장의 자리는 공석인 채로 되어 있어, 때마침 후임관장에는 꼭 조선인이 아니면 아니된다라는 개성부의 요망(要望)이 있고, 후지다(藤田亮策) 선생도 한 사람 상담에 관련하여 고유섭씨를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점점 고유섭씨도 관장 취임을 마음 속에 결정하게 되었을 때, 다나카(田中豊藏) 선생은 크게 이것을 "기뻐하게, 고군, 닭머리〔鷄頭〕가 되더라도 쇠꼬리〔牛尾〕가 되지 말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무쪼록 개성으로 가게"라고 말씀했던 것이 인상에 남아 있다. 그리고 다나카 선생은 다음 일요일에 특별히 애제자를 위해 개성까지 내려가시고 실지답사하시고 돌아오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우에노, 다나카 두 선생의 고유섭씨에 대한 정애(情愛)는 곁에서 보아도 깊고 아름다운 것이 느껴졌다. <中吉功, 「고유섭씨의 추억」,『考古美術』제5권 제6·7호 合集 통권 제47·48호, 1964. 6, 7>
 

   
▲ 개성박물관에서 열린 불상 봉안식(1933~44년) 스님 뒤쪽 왼편이 고유섭 관장.


개성박물관장으로 가는 일에 대해서는 우현 자신이 일기에 적은 간단한 내용도 있다.

우에노 선생이 개성으로 가면 공부도 하고 좋으니 가라 한다. < 1931년 12월19일(음 11월11일) 「일기」>

어쨌든 우현 고유섭은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개성으로 생활의 터전이 바뀐 고유섭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학 및 미술사를 전공한 점에서도 박물관장이라는 자리는 비록 지방에 있는 조그만 박물관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그에게 적임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고유섭은 연구실 조수 시절부터 착실히 다져온 미술사 연구를 구체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개성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을 답사하면서 우리 고대미술의 진상을 규명하고 토대를 구축하는 데 실로 많은 업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착수해 오던 석탑 연구 외에 우리나라 회화사의 문헌 수집, 고려도자의 연구 등 점차 연구의 범위를 넓혀 갔고, 그에 따라 폭넓은 식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의 하나로서, 개성에 온 지 2년이 조금 지난 1935년 6월1일부터 '고려시보(高麗時報)'에 개성의 유물과 유적을 하나하나 소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고려시보'는 1933년 4월에 창간되어 1941년 4월까지 지속되었던 당시 개성의 유력한 지역신문으로, 개성지역 신진 엘리트들이 중심이 되어 매월 1일과 16일, 격주간으로 발행했다. 우현은 '개성고적안내'라는 연재 제목으로 '연복사와 그 유물'(1935.6.1, 7.1)부터 '고려왕릉과 그 형식'(1940. 10.1)까지 총 연재기간 5년 4개월에 걸쳐 서른 한 편의 글을 발표했다.

그런데 중간에 '중대본시법왕기(中臺本是法王基)'(1937. 12.1)와 '고려의 경(京)'(1940. 9.1) 사이에는 2년 9개월의 공백기간이 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연재한 기간은 대략 2년 반 정도라 하겠다.

이렇게 '고려시보'에 연재했던 글이 주를 이루고 그 밖의 문예지에 발표했던 글이 덧붙여져 '송도고적'이라는 책이 1946년 3월 박문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우현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송도고적' 초판에 실린 제자 황수영(黃壽永)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단행본으로 세상에 공포함을 굳이 사양하시던 선생께 조르다시피 하여 상재의 승낙을 얻은" 것이 1939년이었는데, 일제 말기 내외 정세의 급변에 따라 출판 사정이 여의치 못해 출간을 미루어 오다가 끝내 유저(遺著)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우리말로 된 선생의 첫 저서(첫 단행본은 日文으로 된 「朝鮮の靑瓷」(日本 東京: 寶雲舍, 1939))로 손수 엮어 교정과 조판까지 마친 상태였으며, 병석에서도 이 책의 출판에 대해 여러 차례 걱정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선생의 1941년 9월19일자 일기를 보면 "'송도고적'의 출판에 즈음하여 그 표지 속에 쓸 장화(裝畵)로 박물관 진열의 석관(石棺)에서 천녀상(天女像)과 화룡상(花龍像)을 취탁(取拓)하여 보았다"라고 씌어 있으니, 이 책에 대한 선생의 특별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개성박물관 시절에 대한 우현의 부인 이점옥 여사의 회상이 단편적이나마 남아 있다.
개성으로 이사 온 것은 1933년 4월19일(음 3월25일)이었다.

-사택은 일본식으로 지어서 한국 사람이 살기에는 참 불편하였다. 살림집과 사무실이 한데 붙어 있었다. 조그만 밭이 딸려 있었고 벚꽃도 많이 피어 있어서 경치는 참 좋았다. … 사무실은 개성 신궁 바로 밑에 있었다. <1933년 4월1일 '일기'중 우현의 부인인 이남옥 여사가 덧붙인 글 중에서>

-개성에 와서도 가끔 주일이면 도시락 두어서넛씩 싸가지고 사람을 데리고 고적 답사를 다녔다. <1933년 10월26일 '일기'중에서>
 

 

   
▲ 이화여전에 출간하며 지녔던 교원 신분증명서.


한편 1936년부터는 당시 이화여전 문과 과장이었던 이희승의 권고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미술사 강의를 나가게 되어, 기차를 타고 경성에 와서 강의를 하고 다시 저녁 기차로 개성으로 내려갔다. 그 후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專門學校)에서 동료 교수로 있으면서 우현과 필자와도 대학 동기동창인 우촌(又邨) 서두수(徐斗銖) 형과 함께 개성박물관으로 우현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격조(隔阻)하였던 구회(舊懷)를 세속적인 환담(歡談)으로 풀어버린 후에, 이화여전 문과의 시간강사로 초빙(招聘)할 뜻을 알렸더니, 우현형은 흔연(欣然)히 승낙해주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자주 만나게 되어 방과 후에는 우리 세 사람이 시내 도심를 산책하였으며, 혹 선전〔鮮展, 朝鮮美術展覽會〕이 열릴 때에는 함께 관람하기도 하였다. 미술에 전연 문외한인 필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화면(畵面) 앞에 섰을 적에는 우현이 곧잘 평이하고 합리적인 설명을 해주어서 필자에게도 그럴듯하게 이해가 되곤 하였었다. <이희승,「又玄 형의 추억」,같은책>

또한 이 시기에 일찍이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고유섭을 찾는 많은 젊은 학도들이 있었는데, 그는 이들과 더불어 전국을 답사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뒤에 우현의 가르침을 받들어 우리 미술사학 분야에서 큰 활동을 하는 제자들이 되었다. 특히 이때에 조사한 개성의 유적, 유물을 1935년 이후 개성의 민간자본으로 발간되는 주간지 '고려시보(高麗時報)'에 소개됨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고유섭이 박물관장으로서 직무를 처리한 모습과 유적지를 찾아 갔을 때 보여준 인간적인 모습을 역시 나카기리의 추억담 속에서 엿보자.

나는 고유섭씨와 둘이서 철원(鐵原)의 도피안사(到彼岸寺)를 탐방하여 본존의 배면에 있는 함통(咸通) 6년(865)의 조상명(造像銘)을 탑영을 하러 갔던 적이 있는데, 그 때의 탑영은 지금도 내 서재의 벽에 걸려 있다. 또 1931년의 봄 개성의 사적을 찾고, 남대문의 개성여관(開城旅館)에 하룻밤을 묵었는데, 조선여관에 묵은 것은 나에게는 처음이었다. 다음날 고려 태조 현릉(顯陵)에 참예(參詣)하고 푸르러진 잔디밭, 아주 조용해진 분구(墳丘)를 바라보아 왼쪽에 건립된 정자각(丁字閣) 등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이 남아 있다. 그보다 영통사지(靈通寺址)를 찾아 거기에 서 있는 세 기의 석탑을 조사하고,점심을 먹었다. 다음으로 공민왕릉(恭愍王陵)에 다다르자 능묘의 장엄함을 잊을 수 없다. 잠깐 전방(前方)의 화전(火田) 중에서 나는 범자명(梵字銘)과 가릉빈가(迦陵頻伽)의 모양이 있는 수막새기와를 채집하였지만, 고유섭씨는 범자명이 있는 와편(瓦片)을 주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정말이지 아쉬운 모습 그대로였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나 고유섭씨가 개성박물관장에 취임하게 되었음으로 나는 그 기와를 고유섭씨에게 기증하는 것으로 하였다. 채집 당시의 고유섭씨의 정말이지 아쉬워하는 얼굴빛을 추억하고서 무엇인가 쓸모가 있었으면 생각하고 증정한 것이었지만, 고유섭씨는 이에 대하여 박물관의 공인(公印)을 찍은 감사장을 부쳐온 것은 정말로 뜻밖이었다. 더구나 박물관의 진열장 유리상자 중에 기증자인 내 이름을 기입한 제첨(題箋)까지 붙어 있던 것을 후에 알고, 고우섭씨가 내 후의(厚意)를 끝까지 공적인 것으로서 수리(受理)한 공정무사(公正無私)한 태도에 감격을 새로이 하였지만, 여기에도 고유섭씨의 인격의 고결함을 엿볼 수 있다. <『考古美術』제5권 제6·7호 合集 통권 제47·48호, 1964. 6,7>

최근 학계에서는 '개성학(開城學)'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쓰이고 있다. 경주나 서울ㆍ평양 등 역사도시에 대한 일련의 연구들처럼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성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학문분야를 일컫는 용어이다.

개성학을 연구 주제로 삼은 이들은 한결같이 개성학의 기초를 놓은 분으로 우현 선생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송도고적'은 이미 고전(古典)이 되었다. '송도학(松都學)' 또는 '개성학'을 여는 이토록 튼튼한 기초를 이미 1930-40년대에 놓은 것이다.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