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 그의 삶과 학문세계
7. 경성제국대학의 학우들 배움의 길 - 세번째
   
▲ 경성제국대학 시절, 문과 B조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1920년대 후반. 첫째 줄 왼쪽부터 서두수, 주칭로, 최용달, 이희승, 고유섭, 둘째 줄 왼쪽부터 한기준, 성낙서, 변정규, 김형철, 안용백, 송인정, 윤용균, 셋째 줄 왼쪽부터 한재경, 김영준, 김용환.


경성제대 2회 44명 입학 … 문과 27명

오명·문우회 등 모임 민족정신 탐구

우현, 이강국·서병성과 각별한 우정

사후 추모글 발표하며 그리움 전해



동숭동 캠퍼스는/조각조각 부서지고/즐비한 호화주택/위풍이 으리으리/반백년 학문의 전당/그 바람에 날렸다.//한그루 마로니에/수십 주의 은행나무/그 언제 그 밑에서/철학하던 시절이여/변화가 진보 만이야/ 전통 잃은 고아도//몰골 변한 낙산(駱山) 위엔/아파트가 진(陣)을 치고/낭만서린 대학가엔/공해연기 자욱하이/이것이 진전한 현대(現代)를/잘도 상징(象徵)함인지

위에 적은 시는 국어학자로 유명한 일석 이희승(李熙昇)의「동숭동 캠퍼스」란 시의 일부이다.

이 시는 일석이 경성제대 동창이었던 변정규(卞廷圭)와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창작한 시로서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변정규가 메모지에 남겨 놓으신 것을 그의 아들인 전 서강대학교 부총장이던 변종서 박사가 보관하다가 동기동창모임에 가지고 나와서 빛을 보게 된 작품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 모두 1925년 제2회 경성제국대학 예과 법문학부 B반의 동기생으로 우현 고유섭과도 5년 동안 학창생활을 함께 하였던 학우이다.

자료에 따르면 경성제국대학 제2회 입학생 중 조선인 학생은 모두 44명이었다. 이 가운데 문과A반은 9명이었고 문과B반은 18명이었으며, 이과(理科)는 17명이었다. 이 가운데 고유섭이 소속했던 문과B반의 동기생은 한 명이 예과를 중퇴했고, 두 명은 불행하게도 재학 중 사망하였으며, 법학전공의 사경욱(史敬郁)은 3회로 졸업했다. 입학 동기 18명 중14명만이 함께 경성제대를 졸업하였다 <표 참조>.

지난 회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문과 2회에서 제일 친한 친구들이 모인「오명회(五明會)」란 모임이 있었다. 이강국(李康國, 法)·한기준(韓基駿)·성낙서(成樂緖)·고유섭(高裕燮)·이병남(李炳南, 理科) 등 다섯이 민족정신을 찾고자 해서 1주일에 한 번씩 모여 토론을 했다.

경성제대 예과 조선인 모임인 문우회(文友會)를 비롯하여, 동숭회(東崇會), 낙산문학회(駱山文學會)에서도 활동 하였는데, 그 동인(同人)을 살펴보면 1회에 유진오(兪鎭午, 法), 신석호(申奭鎬, 史), 강신철(姜信哲, 文), 염정권(廉廷權, 文), 배상하(裵相河, 哲), 함원영(咸元英,醫), 박천규(朴天圭, 醫), 2회에 박문규(朴文圭, 法), 고유섭(高裕燮, 哲), 주칭로(朱秤魯, 法)이다.

소설가로 유명한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은 2회 문과A반이었으나 뒤에 오히려 문과B반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3회 졸업생 가운데 서병성(哲-교육학)은 우현이 개성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일 때 개성으로 찾아와 함께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추측하건대 당시 입학생은 학제(學制) 등 여러 요인으로 학생들 가운데는 연령이 고루지 않았으므로 동기(同期)의 개념도 있었겠지만 전공이나 취미 등에 따라 서클활동 등을 통하여 사귐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현과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로는 보성고등보통학교 동기생이자 경성제대의 동기생인 이강국(李康國, 1906~1953)으로 알려졌다.

그는 우현의 '일기(日記)'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1933년 4월 19일(음 3월25일)자 일기에 부인 이점옥 여사가 가필한 내용 가운데 "날짜는 잊어버렸지만 이강국(李康國)씨가 독일 유학을 떠났다. 강국씨가 독일에 있는 동안 사진기 등을 사서 보냈다. 독일에서 사 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차에서 내릴 때에 일본 형사한테 잡혀 함흥형무소에서 이년 형을 마쳤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강국이 사서 보낸 카메라는 우현이 고적을 답사할 적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우현 고유섭의 이주기(二週忌)(1946년)에 즈음하여 이강국은 추모의 글을 발표하였다.
 

 

   
▲ 1930년대 지인들과 함께.(가운데가 고유섭)


"외우(畏友) 우현 고군(高君)이 유비(有備)의 재덕(才德)을 펴지도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된지 어언 이년이 되었다. 지난 23일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전 인천시민대회에 참석하였든 기회에 대회장에서 미망인을 만나 뵈어 비회 더욱 간절한 바 있더니 이제 군의 이주기를 맞게 되니 모앙하는 회포도 억제키 어려우려니와 해방의 환희를 나누지 못하고 건설의 고락을 같지 하지 못하는 유한(遺恨)은 ○○(원문 해독불가)의 것이 아닐 수 없다. … 줄임 … 중학졸업에서 우리 두 양인이 대학 예과로 덮어놓고 들어가게 된 것도 우연한 인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군에게 미학전공을 권한 것도 나이었나니 불우에서 일생을 맞이한게 책임을 느끼기도 하는 이다. …줄임…개성에서 그날그날의 생활에 쪼들리면서 군의 연침은 깊고 넓어 조선미술사에 있어서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선천적으로 '권세'에 저항하는 성격 후천적으로 수양된 민주주의 정신과 과학적 세계관 풍부한 학식 고결한 인격 얼마나 신조선건설에 특히 민주주의적인 민족문화 발전에 위대한 공헌이 되었을 것이냐? 생각할수록 한만 깊어간다. <출전 : 현대일보, >

한편 동기생 가운데 우현이 별세한 후에도 제자들에게 도움을 준 사람으로는 앞서 말한 일석 이희승이다.
그가 우현 서거 30주기에 쓴 추모의 글이 있다. 조금 길지만 당시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오십 년 전(1925년 4월)의 일이었다.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형과 나는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예과 문과 B반의 동급생으로 입학되었었다. 그 이후 예과 이 개 년, 학부(법문학부) 삼 개 년, 만 다섯 해 동안을 비가 오간 바람이 불거나 날마다 같은 학창(學窓)에서 고락(苦樂)을 함께 겪었던 것이다. 다만 형은 미학(美學)을 전공하고 나는 국어학(國語學)을 전공하게 되어 그 전문분야만이 달랐던 것이다.

당시에 우리 국어ㆍ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도 효성(曉星)과 같이 드물었지만 미학은 더욱 전공하는 학생이 적어서, 나의 기억으로는 우리 동포로서는 오직 우현 형이 전무후무한 유일한 존재(경성제대 제2회 출신)였고, 훨씬 후대에 내려와서 일본인 한 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미학 분야에서 이와 같이 희망자가 적었던 까닭은 학문 자체가 철학과 마찬가지로 어렵기도 한 탓이었지만, 그보다도 그 미학을 전공하고 나온대야 취직이란 것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경성제대의 학생 기풍으로는 우리 동포와 일본인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절대 다수를 점하는 그들은 재학 시대부터 졸업 후의 취직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재학 당시부터 일찌감치 취업운동을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 학생 수의 사분의 일도 안 되는 우리 동포들은 재학 시절에 취직 문제 같은 것은 전연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때 졸업 후에 가서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을 걸어 놓는 동시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면 夕死라도 可矣라)는 생각으로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자기 취미가 끌리는 대로 하고 싶은 학문을 닦아 보자는 일념뿐이었다.

그리하여 우현도 자기의 기호와 취미에 맞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우리나라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명감에 따라 미학을 택하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형이 대학을 마친 후에 취직의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년간 미학과의 조수(현재의 조교)로 남아 있었다. 이 불행이 오히려 형의 학문이 넓이와 깊이를 확충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줄임…

그 후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專門學校)에서 동료 교수로 있으면서 우현과 필자와도 대학 동기동창인 우촌(又邨) 서두수(徐斗銖) 형과 함께 개성박물관으로 우현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격조(隔阻)하였던 구회(舊懷)를 세속적인 환담(歡談)으로 풀어버린 후에, 이화여전 문과의 시간강사로 초빙(招聘)할 뜻을 알렸더니, 우현 형은 흔연(欣然)히 승낙해주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자주 만나게 되어 방과 후에는 우리 세 사람이 시내 도심를 산책하였으며, 혹 선전(鮮展, 오늘날의 국전 國展)이 열릴 때에는 함께 관람하기도 하였다. 미술에 전연 문외한인 필자가 이해하기어려운 화면(畵面) 앞에 섰을 적에는 우현이 곧잘 평이하고 합리적인 설명을 해주어서 필자에게도 그럴듯하게 이해가 되곤 하였었다. …줄임…

어쨌든 형이 남긴 저서와 이들 제자로 인하여, 형의 육체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할지라도 그 학풍과 인품과 정신은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앞으로도 연면(連綿)히 계승되어 가리라고 믿어진다. 따라서 우현의 생명은 초로(草露)와 같이 스러져버린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문화계·학계 특히 미학계에 생동하여 존속(存續)되리라는 것도 확언하여 마지않는다.
 

   
▲ 개성부립박물관 앞에서 친구 서병성(왼쪽)과 함께.


우현은 생존 시에 지독한 애주가(愛酒家)였다. 주붕(酒朋)을 만나서 주막(酒幕)에 당도하게 되면, 그야말로 두주(斗酒)를 사양하지 않을 정도로 통음(痛飮)하는 버릇이 있었다. 필자의 다른 친구들 중에도 이와 같은 통음가(痛飮家)가 적잖이 있었다. 그들이 탐주(貪酒)하는 이유를 알아보면 대개는 동일하였다. 일정시대에는 너무도 잔인한 식민정책 밑에서 우리 동포들, 특히 청년들은 육신상으로 정신상으로 제약(制約)되는 일이 하도 많아서 가슴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울분(鬱憤)과 비분강개(悲憤慷慨)와 정(情)을 달래기 위하여 오직 독주(毒酒)로써 마비시켜 잊어버리려 하였던 것이다. 우현의 주벽(酒癖)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필자는 보통 아닌 불주객(不酒客)이라 우현과 대작(對酌)하여 본 일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의 술 마시는 태도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과음(過飮)을 하여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지언정 결코 주정을 하거나 주사를 부리는 추태(醜態)를 연출하는 일은 보지 못하였다. 그만큼 우현의 취후(醉後)의 행동은 얌전하였다. 이와 같이 우현 형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가노라니, 오십 년 전의 학우(學友)인 그의 면모가 약여(躍如)하게 눈앞에 나타나서 그의 음성이 들릴 듯 들릴 듯하면서도 이내 말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아! 우현이여, 안타까운 학우여! 재천(在天)의 혼령(魂靈)이 평안하신가."
<『考古美術』123·4호(우현 고유섭 선생 삼십 주기 기념 특집호), 1974년 12월>
/이기선(미술사가) soljae@hanmail.net

인천일보,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