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럴 줄 알았다니까! 변명할 것도, 숨을 것도 없이 깨끗하게 쪽팔렸군…. 그렇지만,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불감증 걸린 사내녀석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옆에서 지켜본 내가 더 충격이지…. 2011 김충순. 켄트지 210x290㎜ 연필, 수채.

아마도, 라우라는 생각했다. 아마도, 곧 태양이 뜨리라. 창밖은 다크초콜릿의 농도가 점점 연해져가면서 새벽빛으로 사물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중으로 된 커튼 때문에 방안은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고 형광등 불빛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점령하고 있었다.

라우라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언제까지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외면하고 나가거나, 혹은 그들의 섹스에 동참하거나였다. 그녀는 선택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알몸이었다. 초이는 다다의 위에 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그의 가슴을 혀끝으로 애무하고 있었다. 발끝까지 쭈뼛하게 힘줄이 드러난 다다는 몸을 비틀면서 서 있는 라우라를 힐끔 바라보았다. 다다와 라우라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라우라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초이는 자신의 등뒤에 라우라가 서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의 애무는 거침없었다. 바로 곁에서 자신들의 섹스를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상상이 오히려 더 그녀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라우라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라우라는 다다의 몸위에 엎드려 있던 초이를 옆으로 밀어젖혔다. 초이의 몸에 눌려 있던 다다의 성기가 출렁이며, 독이 오른 뱀의 머리처럼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라우라는 망설이지 않고 그 위로 자신의 몸을 서서히 올려놓았다. 옆으로 쓰러져 있던 초이는 그것을 지켜보더니 싱긋 웃었다. 다다는 초이의 웃음을 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말초감각을 통해 전해져오는 충격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 무엇,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 안에 둥둥 떠있던 태아시절의 자신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다다는 볼트와 너트가 조여지고 결합되면서 단단하게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사의 홈 사이에는 미끄러운 윤활유가 있어서 꽉 끼이면서도 답답하지 않고 부드러웠으며, 더구나 따뜻하고 포근하기까지 했다. 라우라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초이는 다다의 머리쪽으로 갔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으로 가서 다다의 얼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초이를 마주보며 앉았다. 그러니까 침대에 누워 있는 다다의 몸은 마치 외나무 다리가 된 것 같은 느낌었다. 그 외나무 다리 위에서 두 여자가 서로 마주 보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제 다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마주 보고 있는 두 여자였다. 다다의 몸 위에서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사생결단하는 것처럼 두 여자가 움직였다. 엎어졌다, 일어났다, 돌아누웠다, 서로 뒤엉키고 자리를 바꾸고 밀치고 흔들며 긴 시간이 지났다. 다다의 몸은 그동안 진도 9의 강진이 몰려오고 빌딩이 무너졌으며 불꽃이 수없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덮쳤으며 익사체처럼 영혼이 둥둥 떠다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는 혼미한 아침이었다.

다다가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그를 사로잡은 것은 강렬한 후추 냄새였다. 여전히 그의 몸은 알몸이었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코끝을 간지럽히는 강렬한 후추 냄새는 온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방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욕실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주방문을 열어보았다. 라우라가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프라이팬 위에 무엇인가를 볶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무슨 요리를 하고 있어요?"

"요리라고 할 것도 없어요.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볶아봤어요. 맛은 책임 못져요."

다다는 라우라의 뒤에서 그녀가 주방에 서 있는 것을 보며 가슴 뿌듯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아, 이거구나. 이런 느낌이구나. 남녀가 같이 산다는 것에는 이런 행복이 숨겨져 있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한다는 것. 그것이 전해져 오면서 다다의 가슴은 부풀어오른 따뜻한 느낌으로 꽉차기 시작했다.
"샤워하세요. 냄새가 들어가니까 주방문은 닫아야 되는데."

라우라는 베란다로 통하는 주방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환한 햇빛이 하얗게 부서졌다. 다다는 주방문을 닫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려고 했다. 그는 샤워기의 물줄기 앞에서 몸을 씻으면서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려고 했다.

초이가 있었다. 그리고 라우라가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세 사람이 함께 누워 있던 것만 기억이 났다. 하지만 구체적인 것들은 생각나지 않았다. 초이는 언제 갔을까?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초이는 라우라와 다다만 두고 방을 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초이를 만났을 때 그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다다는 방안을 청소했다.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히니까 눈처럼 하얀 햇빛이 쏟아졌다. 정말로 눈부신 햇빛이었다. 지난밤의 칙칙하고 어두웠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베란다 유리문을 열어젖히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두꺼운 커튼까지도 가볍게 흩날릴 정도로 힘 있는 바람이었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조금 있으니 라우라가 그릇에 음식을 담아 테이블로 가져왔다. 다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관광지도며 핸드폰, 지갑, 열쇠 등 잡동사니들을 한쪽으로 밀어젖히고 휴지로 깨끗이 닦았다. 라우라는 컵에 오렌지 쥬스를 따랐다. 에그 스크럼블과 소시지, 그리고 야채 볶음요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식사를 했다.

"언제 일어났어요?"

"잠이 안와서 저는 거의 안잤어요."

그렇다면 라우라는 초이가 가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다다는 언제 자신이 잠들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의 기억이 끝나는 지점을 찾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텅 빈 공간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제 어떡하죠?"

다다가 라우라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