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체로 속없는 녀석들은 여복이 터졌다고 부러워하지만, 이런 일이 생기면 대략 난감, 만약 결혼 후에 일어나면 죽음이지. 나도 한참 젊었을 때 양다리를 하려고 해서가 아니고, 오는 여자 사양하지 않다가 다행히 귀싸대기는 맞지 않았지만…. 엄청 쪽팔리고, 그런데, 요즘 여자들은 이런 거, 진짜 엮이면'나쁜 남자'라고 하면서 좋아한다던데…. 미친 거 야냐? 2011 김충순, 켄트지 210X290 ㎜, 연필, 수채,

이 세상에 남자와 여자, 단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는 언제나 긴장감이 흐르는 법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성적 긴장감이다. 아직 섹스를 하지 않은 두 남녀의 경우, 새벽 4시의 길거리에 두 사람만 남아 있다는 사실은 둘 중 하나를 의미한다. 이 사람과 잘 것인가, 자지 않을 것인가. 즉 특별한 관계로 만들어 갈 것인가, 보통의 관계로 끝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라우라의 몸은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한쪽 다리에 힘을 주고 비스듬하게 서 있는 그녀의 몸에서, 지금부터 전개될 다다와의 관계에 대한 설렘과 흥분이 느껴졌다. 다다 역시, 머릿속에는 라우라로부터 받은 이메일의 내용이 간직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당사자와 새벽 4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꼬리헨떼스 길거리에 남겨져 있는 것이다.

다다는 아무 말 없이 택시를 잡았다. 몇 대의 택시를 그냥 지내보내고 라디오택시를 잡았다. 그는 부에노스 시내에서 특히 한밤중에 택시를 잡을 때는 꼭 라디오 택시만 탄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개인이 불법으로 영업하는 택시들도 있는데 길을 돌아가서 요금이 훨씬 더 많이 나오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어떤 택시들은 범죄조직과 연관된 경우도 있다.

택시를 탔는데, 흘러나오는 것은 탱고음악이다. 50대의 뚱뚱한 택시 기사는 다다와 라우라가 뒷자리에 타자마자, "땅고?"라고 외쳤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밀롱가 앞이었고 손에는 탱고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본 것이다. 라우라와 택시기사는 스페인어로 한참 동안 대회를 했다. 다다도 귀 기울여 보았으나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다다는 "프렌치 이 아우스뜨리아"를 외쳤고, 기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프렌치 이 아우스뜨리아"로 다다의 목적지를 반복했다. 차가 출발하자 라우라는 조금 전에 택시기사와 나눈 이야기를 통역해 주었다.

택시 기사의 이름은, 세바스티안. 그의 사촌 형과 동생이 탱고를 열심히 추는 땅게로라고 했다. 다다의 집까지 가는 동안 세바스티안은 라우라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다다와 라우라 두 사람만 남아서 자칫 어색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택시기사가 절묘하게 그 어색한 공간을 메워주었다.

세바스티안은 항상 택시 안에서 탱고음악을 틀어놓고 있는데 탱고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너무 몸이 뚱뚱해서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우라가 탱고를 추면 몸이 날씬해진다고, 조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살이 잘 빠진다고 했더니, 세바스티안은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밤에 일하는 시간이 많아서 밀롱가를 갈 엄두는 못 내고 그렇다고 낮에 탱고를 배우러 다니자니 몸이 피곤해서 쉬는 게 먼저라고 했다는 것이다.

꼬리엔떼스 밀롱가에서 프렌치 거리와 아우스트리아 거리가 만나는 다다의 집까지는 10분이 조금 더 걸렸다. 차는 인적이 거의 끊어진 새벽의 어스름 속에 다다의 집 앞에 도착했다. 다다는 돈을 내고 차에서 내렸다. 라우라가 다다의 뒤를 따라왔다. 다다는 아파트의 문 앞에 서서 열쇠를 찾았다. 그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좁은 보도를 따라 키가 큰 가로수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리였는데, 나무 뒤에서 검은 물체가 움직였다. 순간, 다다는 열쇠를 찾던 손을 멈추고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다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그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다다의 곁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라우라도 다다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채고 다다의 시선이 멈추는 곳을 따라갔다.

나무 뒤에 서 있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며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초이였다. 새벽 4시가 넘은 시간에, 초이가 이곳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다다와 라우라는 깜짝 놀랐다. 예기치 않은 시간, 예상할 수 없는 장소에서 의외의 사람과 맞부딪칠 때 누구나 놀라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지금은 더욱 이상한 상황이었다. 두 남녀는 이제 곧 첫 섹스를 시작하려고 마음을 맞춘 상태였다. 서로 소리 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섹스에 대한 긴장감과 설렘은 그들을 보이지 않게 감싸며 묘한 흥분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그런데 초이가 나타난 것이다.

다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초이는 몬테비데오에 있어야 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일요일마다 열리는 몬테비데오의 가장 큰 시장인 페리스타 데 뜨리스뜨에 가서 인디오들이 만든 이국적인 물건들을 보고 쇼핑을 즐겨야 할 그녀가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나타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다가 삼 개월 만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것은 어제 오후였다. 아직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이곳에 숙소를 정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가르시아밖에 없었다. 가르시아는 자신의 누나인 라우라를 다다와 함께 있게 하려고 밀롱가에서 나오자마자 혼자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런데 어떻게 초이가 이곳을 알고 기다리고 있을 수 있을까.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초이는 손을 내밀었다. 다다는 어색하게 초이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초이는 라우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라우라 역시 초이를 발견하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하게 서 있었다.

"내가 방해한 거야?"

"아니야. 밀롱가 갔다가 술 한잔 더하려고 온건데."

누가 봐도 궁색한 변명이었다. 이 시간, 다다가 라우라와 함께 자신의 아파트 앞에 있다는 것은, 술을 한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는 것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안 들어갈 거야?"

초이가 재촉하자 그제야 다다는 다시 열쇠를 찾아 아파트의 출입문을 열었다. 초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라우라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다다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라우라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라우라를 이대로 돌려보내고 초이와 단둘이 남아 있기도 어려웠다.

초이는 출입문 안쪽 엘리베이터로 가서 서 있었다. 다다는 라우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우라는 망설였다. 그녀 역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러운 초이의 출현은 다다와 라우라 두 사람을 모두 혼란에 빠뜨렸다.

라우라를 향한 다다의 손이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시간이 흘렀다. 불과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30년이 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라우라가 천천히 손을 들어서 다다의 손을 잡았다. 다다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라우라가 초이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가는 것이 좋은 일인지 반드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대로 라우라를 돌려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우라는 다다의 손을 잡고 아파트의 출입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함께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다다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덜컹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낡았고 좁았다. 세 사람의 어깨가 맞닿았다. 다다를 가운데 두고 초이와 라우라가 왼쪽과 오른쪽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바깥 문을 닫고 그 내부에 미닫이문처럼 되어 있는 철제문까지 닫고, 다다는 4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