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체육계의 두 거목>
 인천 체육을 말하자면 곽상훈(郭尙勳·1896∼1980년)과 정용복(丁龍福·1910∼1977년) 두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 다 경기인 출신은 아니었지만 인천 체육을 개척하고 진두에서 이끌어온 체육계 대부로 인천 역사는 기록한다. 곽상훈은 1920년 6월 경인기차통학생을 주축으로 한용단(漢勇團)을 창립해 체육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천 야구의 전설과 신화를 창조한 장본인이고, 정용복은 1950년대 이후 인천 체육계를 이끌면서, 숭의동 옛 인천공설운동장을 재건한 인물이다.
곽상훈은 원래 동래 출신으로 소년 시절에 인천으로 이주했는데,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재학하면서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주도했고, 한용단 야구팀 단장으로 일본팀에 맞서 애국의 투지를 불태웠던 이른바 ‘웃터골의 맹호’였다. 1924년 인천경찰서 검도 사범 기요타(淸田)와 실랑이를 벌인 것도 그 같은 곽상훈의 기백을 말해 준다. 일본 심판의 편파 판정이 발단이 된 이 사건은 응원 군중이 본부석으로 몰려가는 충돌 사고로 발전해서 급기야 진압 경찰까지 동원되었는데, 이 일 때문에 몇 년 동안 웃터골 야구전은 중단되고 말았다.
“한용단의 이름은 높았고, 시민들의 기대는 컸었다. 야구 대회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시민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엿장수도 오고, 지게꾼도 줄을 섰다. 그것이 오늘날의 인천 야구를 전국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 자연 발생적인 야구 붐은 한용단이 지도, 육성시킨 것이다.”라고 ‘인천석금’은 적고 있다.
곽상훈은 3·1운동에도 가담했고, 후에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 신간회, 동아일보 인천지국장, 한민당인천지부 위원장을 거쳐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이후 내리 5선에 성공하며 민의원(民議院) 의장을 역임했다. 그가 정치가로서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기면서 우리는 신문 지상을 통해서나 그의 강단 센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용복은 충남 서산 출신으로 역시 소년 시절 이주해 와 한평생을 보이스카웃과 체육계를 위해 활동했다. 1950년대 초반부터 인천체육회와 경기도체육회 이사장직을 두루 맡았었는데, 인천 체육계는 그가 미군의 지원을 끌어내 맨 흙더미였던 숭의동 공설운동장 야구장을 보수하고 육상경기장 스탠드 공사를 벌인 공로를 잊지 못할 것이다. 검은 뿔테 안경, 펄럭이는 바바리코트에 사진가, 영화 기획자로서 문화계 쪽에서도 이름을 날렸던 만년 신사의 풍모가 눈에 선하다.
어제 체육의 날, 전국체전을 마치면서 인천 체육계의 두 분 선구자, 두 분 거목을 이렇게 짧은 글로써나마 추억해 본다. /시인 eoeu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