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각균 인천VOVE봉사단 단장

 FM라디오 ‘격동 50년’을 들으면서 40년전 일기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날 이국땅에서 상봉한 대통령, 영부인, 파독 광부, 간호사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60년대 대학생 출신 광부, 간호사들은 고국의 근대화를 위해 눈물겨운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받으려고 서독에서 갖은 수모와 박해를 견디며 새마을운동으로 오늘의 젊은 세대가 있게끔 했습니다. 선배들의 조국근대화 정신과 애국선열들의 희생으로 지켜온 우리나라가 젊은 세대에 의해 흔들리고 있습니다. 꼭 40년전 우리나라 GNP는 79달러. 당시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파독광부 500명(응시자 4만6천명)은 대부분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이었습니다. 정부 공식통계로 남한인구 2천400만 명중 실업자만도 250만명이 넘었습니다. 1963년에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임금을 받기로 하고 파독광부들은 루르탄광 지하 1천m∼3천m 사이 막장에서 1m 파들어 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다고 합니다.1966년 12월 3년의 고용체결기간을 마치고 142명의 파독광부 제1진이 귀국했습니다. 귀국한 전원이 골절상 병력과 폐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사망자와 실명된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간호학을 전공하고 파독된 우리 간호사들의 사정도 비슷한 환경이었습니다.
1966년 1월 128명이 서독으로 파독될 때 월급 440마르크(110달러)의 고용계약으로 맡았던 일은 알콜 묻힌 거즈로 죽은 시체의 몸을 닦는 것이었습니다. 70년대 중반에는 서베를린에만 한국 간호사가 200명이 넘었습니다. 66∼76년 서독으로 건너간 간호사가 780여명. 광부, 간호사들의 송금액만도 연간 5천만 달러,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60년대 파독근로자가 일할 무렵에 우리나라 GNP의 3배가 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당시 필리핀은 1인당 GNP가 257달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필리핀 근로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 국민이 기피하는 일자리 3D업종에서 종사하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 해외 근로자 생활의 역경을 상기하여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구절 더 읽어 나가지 못했습니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 짖지 못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老馬之智’고사 한토막을 소개하면서 지역사회의 발전과 사회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자원봉사자의 정신자세로 애국을 하자고 호소합니다. 중국 춘추시대 명재상 ‘관중’이 한겨울 악천후속에서 그만 길을 잃고 사고를 당했습니다. 모두가 우왕 좌왕하고 있을 때 ‘관중’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무리중에 제일 나이 많은 말을 풀어 놓아라”했습니다. 경험이 많은 말을 풀어놓고 모든 일행이 그 뒤를 졸졸 따라 갔는데 마침내 길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