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정 인천보훈지청장
우리나라가 대외적으로 개방을 하였다면 일본에 의해서 ‘병자수호조규’란 이름으로 1876년에 강화도에서 맺은 것을 그 시발로 보고 있다. 하지만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뒤이은 구한말의 외세에 의한 혼란 속에서 우리나라는 서방에 알려진 바,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로 흔히 불려졌다. 불과 우리 보다 20여년 앞서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서 개방된 일본은 서구 문물 등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1900년대를 전후해서 서방 열강 등과 함께 각축을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Land of Rising Sun)라고 알려지는데 보탬이 되었다. 지척을 두고도 너무 상이한 이름이라,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썩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
지금은 그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서 우리나라도 세계 속의 엄연한 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에서 보는 우리나라는 특히 6·25 전쟁으로 잘 알려진 한국전쟁을 그나마 연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 민주화 과정, 올림픽 개최와 월드컵 등도 우리나라를 알리는 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정치의 후진성도 잘 알려져 있지만, 경제의 비약적 성과도 나름대로 평가를 받고 있다.
지역별로 수도 서울이 우리나라의 거의 전부를 대표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그 나머지 도시로는 아마도 이곳 항도인 인천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1950년 9월 15일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때문이다. 간만의 차를 극복하고 수륙양용작전으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한 결과는 침략군인 북한군의 허리를 자름으로써 수도를 회복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이 작전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 역사는 판이하게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 작전은 세계적으로도 전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난 1990년, 1991년 걸프전에도 미국 주도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 방식을 고려했을 정도이다.
13년 전 영국에서 생활할 때, 우연히 미식축구의 백미인 슈퍼보울 경기 생방송을 시청하던중, 그 경기가 태평양, 대서양, 지중해 등 전 세계에 떠 있는 미국함정에도 생방송 되고 있음을 알려 주는데, 자막에 귀에 익은 엔터프라이즈, 아이젠하워, 링컨, 케네디, 키티호크 등 항공모함 이름과 함께 ‘인천함’ (USS Inchon, United States Ship Inchon) 이름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가? 깜짝 놀랐고 한편 반갑기 짝이 없었다. 몇 십분 후에 다시 나타날 때를 기다려서 두 세 번 더 본 기억이 난다. 그 순간에 그처럼 ‘인천’이 유명한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
미국 해군의 각종 항공모함과 각종 구축함, 순양함 등의 이름은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이름이나 전투와 관련된 지명 이름을 통상 붙인다. 단지 자국내 지명뿐이 아니라, 직접 작전을 수행하여 해상 작전의 한가지 교범을 창안하였다고 할 정도인 이곳 인천도 자국내의 해군 함정에 명명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의 힘과 함께 우리 항도 인천의 자랑스런 모습을 보는 듯 했다. 1970년 6월 20일부터 활동을 개시한 인천함은 200m 가까운 길이를 가진 헬기 항공모함과 어뢰 소해정으로 1천400명의 수병이 생활할 정도의 결코 작지 않은 함정으로, 2002년 6월 20일 퇴역할 때까지 32년 동안 전 세계에서 혁혁한 활동을 하였다.
인천함은 퇴역을 앞두고 최초로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짧은 체류 기간 때문에 부산에만 정박한 것으로 확인되어, 정신적 모항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 인천에 닻을 내리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인천함 수병들이 자신들 함정의 마음의 고향이 되는 모국을 찾은 것을 반갑게 여기고, 인천함 출신 장병들이 ‘인천함 전우회’를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호국 간성의 도시로서 인천에 대한 자부심과, 반세기 전의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였던 역전의 용사들, 그리고 지금은 인천함이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지만, 인천함에서 고락을 했을 수병들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