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누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을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날 민족대표 29인은 탑골공원이 아니라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낭독자는 만해 한용운.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경찰에 자수했다. 33인 중 4인은 지역 만세운동을 지도하느라 상경하지 못했다. 오후 2시 탑골공원에는 4000~5000명이 모여 있었다. 주요 학교마다 탑골공원으로 모이라는 은밀한 공지가 이미 전달된 덕이다.

당시 일본 경찰과 검찰 기록에 탑골공원 낭독자 이름은 없다. 체포된 사람 가운데 10여명이 낭독자의 인상착의를 진술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30~40대, 크지 않은 키,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체격, 흰색 두루마기에 중절모 차림'.(KBS 'NEWS 100'에서 인용) 그런데, 1950년대에 본인이 낭독자라고 밝힌 인물이 등장했다. 당시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해주의 감리교 미션스쿨인 의창학교에서 교사(교감)로 재직하던 정재용이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김창준 목사로부터 원산으로 보낼 독립선언서 보따리를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중 한 장을 주머니에 넣고 탑골공원으로 가 군중 앞에서 읽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러 자료에 낭독자가 정재용으로 되어 있는 이유다.

하지만 2018년 신용하 교수가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의 증언과 일본 순사의 기록을 근거로 낭독자가 정재용이 아니라 한위건이라는 설을 제기했다. 한위건은 당시 경성의전 학생이었다. 그는 3·1운동 이후 의사의 길을 접고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가 조선공산당 지도부로서 중국으로 망명, 1937년 사망했다. 그밖에 김원벽이었다는 설도 있다. 연희전문 학생대표였던 김원벽은 일본 경찰 진술에서 자신은 탑골공원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지금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우리 조선 사람들이 자주 국민임을 선언하노라.” 낭독자가 누구였건 압제자로부터 '입틀막'을 당하지 않았기에,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가 우렁차게 울려 퍼질 수 있었다. 이로부터 약 두 달간 조선민족이 사는 곳에서는 만세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세계도 놀랐고, 민족지도자들도 놀랐다. 이같이 거세고 도도한 흐름이 터져 나온 전례가 없었다. 기미년 3월을 기점으로 민족운동의 물줄기는 갑오년(1894) 농민봉기와 의병전쟁, 독립운동으로 정리되었다. 독립한 나라는 민주적이고 공화정이어야 한다는 의견일치도 이루어졌다.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