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 대대적 모금…초대 이사장엔 이기붕

1954년 2월3일 김법린 문교부장관
법인 설립자 지명 후 설립기성위 회의
이사진·정관·학칙 등 주요 사항 결정
이틀 만에 재단·대학 설립 인가 허가

기금 조성 목적 차관 중심 5개 반 편성
공사·지자체·기업·공무원 '십시일반'
4·19혁명에 정부·자유당 버팀목 꺾여
5·16쿠데타 겹치며 학내 혼란 이어져
▲ 인하대 본관 중앙에 학교법인 정석인하학원기와 교기가 휘날리고 있다. /사진출처=인하대학교
▲ 인하대 본관 중앙에 학교법인 정석인하학원기와 교기가 휘날리고 있다. /사진출처=인하대학교

인하공과대학 설립기성위원회는 대학을 운영할 재단으로서 법인 '인하학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1954년 2월3일 기성위원회 위원장 김법린 문교부장관은 법인 설립자 10인을 지명하고 법인 설립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문교부장관실에서 열린 회의에는 김법린 위원장, 이기붕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 안동혁 상공부장관, 윤성순 교통부장관, 최규남 서울대 총장, 손노듸 외자구매청장(조달청장), 표양문 인천시장, 박만서 기성위원회 고문 등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이사 9명과 감사 2명이 이의 없이 결정됐다. 이사 9명은 이기붕, 김법린, 안동혁, 김유택, 윤성순, 최규남, 손노듸, 표양문과 인하공과대학장이고, 감사 2명은 박만서와 안봉익이다.

김법린 문교부장관의 추천에 의해 인하학원 이사장에는 이기붕 의장이 만장일치로 선출됐으며, 이사장 명의로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신청하기로 했다. 이날 인하학원 정관 심의, 재단법인의 자산·수지계산서 심의, 학칙 심의, 학생 모집 요령 및 6개 학과 180명 모집 등이 의결됐다. 인하학원 및 인하공대 설립의 주요 사항이 모두 이 회의에서 결정됐다.

▲ 1954년 10월5일 인하공대 개교기념식은 동아, 조선 등 중앙 언론에 보도되고, 라디오 방송으로 실황 중계됐다. /사진출처=인하50년사(하)
▲ 1954년 10월5일 인하공대 개교기념식은 동아, 조선 등 중앙 언론에 보도되고, 라디오 방송으로 실황 중계됐다. /사진출처=인하50년사(하)

1954년 2월3일 신청된 재단법인 인하학원 및 인하공과대학 설립 인가 신청은 이틀 뒤인 2월5일자로 허가됐다. 이로써 인수인계 절차를 마친 설립기성위원회는 해산되고 2월27일 법인 설립등기가 완료됐다. 2월5일 인하대학의 설립이 인가되자 문교부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그 의미를 국민에게 알리는 담화를 발표했다.

인하공과대학은 이승만 대통령의 구상과 지시에 따라 추진돼 법적으로는 문교부가 설립 사무를 관장했다. 법인설립자 대표인 이기붕은 보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23년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대학 인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해방 이후 이승만 박사의 최측근으로서 이 대통령 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 군악대가 인하공대 개교기념식에서 주악을 담당했다. /사진출처=인하50년사(하)
▲ 군악대가 인하공대 개교기념식에서 주악을 담당했다. /사진출처=인하50년사(하)

인하대학 설립기성위원회는 대학 설립을 위한 재단법인 인하학원의 재원을 총 515만500불(3억903만환)로 계획했다. 인하대학은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에서 운영한 한인기독학원의 매각 대금 15만불을 기본으로 추진됐는데 대학 설립 당시 명목상으로만 잡혀 있었다. 당시(1954년 2월3일) 김법린 인하공과대학설립기성위원회 위원장은 설립 기본금으로 확인하는 '하와이교포 갹출금 적립확인증'만 작성해 놓은 상태였다. 이 기본금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이사회로부터 하와이 오중정 영사에게 인계되고 다시 샌프란시스코 주영한 총영사에게 전달된 뒤 오랫동안 인하대학에 들어오지 않았다. 4·19로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한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다시 주영한으로부터 하와이동지회 최백렬에게 넘겨진 기본금은 1962년 11월17일에서야 이자를 합친 17만9353불이 인하대학에 전달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발적인 기금 조성을 촉구한 것과는 달리 설립기성위원회는 위원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기금 조성에 나섰다. 국내에서는 차관급으로 5개 반을 편성해 정부 출연 공사와 경기도, 인천시는 물론 기업, 정부 산하 경제단체, 박흥식·김성곤 등 독지가 그리고 정부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소속 공무원 봉급에서 5%씩 갹출하는 등 목표액에는 모자랐지만 대단한 성과였다. 다만 외국 원조 기관의 지원은 거의 부진했다.

4 · 19혁명 이후 인하대 동창회는 “인하공과대학은 전국 재야 유지의 기부금과 전국 봉급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국민학교 아동들의 성금으로서 창립 발족하였음은 만천하가 공지(公知)의 사실”이라며 전국민이 성금을 모았다고 밝혔다. 그만큼 인하대학의 설립은 문교부의 표현처럼 '거족적'이라고 할 만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1960년의 4·19혁명은 인하공과대학의 시련으로 다가왔다.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설립된 인하공과대학의 버팀목이 하루아침에 와해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1960년 10월28일 재단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현재의 이사진이 총사퇴하고 새 재단 영입을 위해 교수회, 동창회 및 후원회가 활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5·16군사쿠데타 등 외부 정치적 상황의 급변에 따라 학내에서도 즉각적으로 혼란이 발생했다.

▲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

 


 

<1954년 2월 8일 문교부 담화>

인하공과대학 설립절차를 마치고

본관은 작년 5월 이래 이 대통령 각하의 특별하신 분부와 거족적인 노력에 의하여 하와이 동포민족운동 50주년기념사업으로 추진되어 오던 인하공과대학이 금월 5일자로 그 유지재단인 재단법인 인하학원과 아울러 정식설립절차를 필하였음을 만천하 동포에게 공표할 수 있게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회고컨대 멀리 수륙만리(水陸萬里)를 격(隔)한 하와이 거주 동포들과 본국내 각계각층 인사들의 정성을 규합하여 이루어진 이 대학은 우리 교육사상(敎育史上)에 새로운 한 폐이지를 기록하는 것으로서 머지 않은 장래에 한국에서는 물론 전 세계에 그 이름을 자랑하게 될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그 동안 본 대학의 재단 확립을 위하여서는 하와이 동포들의 눈물겨운 기부금 15만불과 정부보조금 100만불 및 인천시 기증 교지 12만여 평을 필두로 정부 각 부처와 산하 공무원의 갹출금, 대한중석주식회사, 화신산업주식회사, 대한금융단 등 각 기관, 전국 방방곡곡으로부터의 기부금 등 총액 2,700만환이 넘는 거액이 단시일내에 수집되어 이제 2억5천만환의 재단을 구성하게 된 것을 우리 교육사상에 일즉이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성사(盛事)로서 우리 교육기관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

새로 취임하신 재단이사장 이기붕씨 이하 9인의 고명하신 임원들과 저명한 학자들로 구성된 교수진으로써 본 대학에서는 단기 4287년 4월 1일을 기하여 기계공학과, 조선공학과, 광산학과, 금속공학과, 화학공학과, 전기공학과의 6학과에 180명의 신입생을 마지하고 인천시 용현동 본 교사에서 기념적인 개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300평의 부속공장이 낙성을 보았으며 해빙을 기하여 웅대한 본관 건물이 기공될 것이므로 교사 시설에 있어서도 염려가 없게 되었읍니다.

본 대학설립에 제하여 이 대통령 각하를 비롯한 정부 각 기관 및 물심양면으로 많은 성원과 협조를 다해주신 국내 각 언론기관 및 해내외 동포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본 대학의 육성발전을 위하여 많은 성원이 있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단기 4287년 2월 8일 문교부장관 김법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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