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시절 인천에서 왔다고 하면 고참들은 먼저 '짠물'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아마 인천이 천일염 주 생산지로 이름을 널리 알려서이리라. 곧 이어 노래 '일발장전'이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노래 제목은 바로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인천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이 재촉했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하루에 한 갑 두 갑 낱갑이 열두 갑/치마 밑에 감추어서 정문을 나설 때/치마 밑에 불이 붙어∼(후략)” 민망한 가사 내용임에도 군대 용어로 '까라면 까' 식이었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는 1960~1980년대 군대에서 주로 불린 구전 노래다. 그 유래는 가사에 나온 대로 인천의 성냥공장이다. 1917년 일본 기업이 제물포에 성냥공장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인천은 마치 '성냥공장의 대명사'처럼 불렸다. 당시 성냥공장은 위험한 화학물질인 인을 취급한 탓에, 경성보다는 원료 수입이 편리한 인천에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 1960년대까지는 성냥 한 갑이 쌀 한 되에 맞먹을 정도로 고가품이었다. 그렇다 보니 성냥공장에서 성냥 한두 갑을 빼돌려 암시장에 내다팔면, 쏠쏠한 돈벌이로 취급됐다고 한다.
1917년 설립해 국내 첫 성냥공장으로 알려진 동구 금곡동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최초'로 보기엔 무리라는 지적을 받는다. 이보다 32년 먼저 서울 용산에서 문을 연 성냥공장이 있다는 주장이 나와서다. 조선 말 정부의 특허장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설명이다. 김성수 인천공항본부세관 과장은 최근 “개항기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설립됐다는 그동안의 설은 틀렸다”며 근거 사료들을 최근 인천일보에 공개했다.
이 중 눈에 띄는 자료는 조선 후기 외교·통상사무를 관장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1885년 9월3일 용산에 성냥공장 설립을 허가하는 내용을 담은 특허장이다. 한 외국인 상인이 용산에 유리를 제조하는 기업을 추진했다가 어그러진 뒤, 그 자리에 성냥공장을 지었다고 한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그에게 소정의 세금납부와 1년 내 사업개시란 조건을 달아 특허를 내줬다. 용산 공장 성냥은 가격과 품질 면에서 낮아 고전했으나, 제품을 판매하며 실제로 수출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성냥은 1827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발명됐다. 1886년 제물포에 들어선 독일 세창양행 무역상사가 성냥을 수입해 팔았고, 1917년 10월엔 국내 최초의 성냥공장이 금곡동에서 문을 열었다는 게 학계 정설이었다. 아무렴 어떤가. '인천 최초'에서 성냥공장 하나쯤 빠졌다고 대수랴. 그래도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사실'을 밝혀야 할 듯싶다.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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