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의동 109번지 동네의 아카시 나무

며칠 전 숭의동 109번지 언덕의 골목에서 예상치 못한 아카시아 향기를 맡았다. 바람 불 때마다 진한 꽃향을 사방에 흩뿌렸다. 그 향기는 고교 시절 추억의 한 장면을 소환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아카시아 숲으로 둘러싸였다. 5월 중순부터 아카시아 향기가 교정 가득 진동했다.

고3 초여름 어느 날 점심시간에 친구와 함께 숲속 나무 벤치에 앉아 잡담을 나누다 벤치 하나씩 잡고 잠시 누웠다. 그날따라 꽃향기가 아주 진했다. 몽롱해졌다. 깨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의도하지 않았던 땡땡이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정확한 이름이 '아까시'인 이 나무는 1891년 일본인이 중국 상해에서 묘목을 가져와 인천공원(현 인천여상)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 땅에서의 시작이다. 1년에 3m씩 자라는 성장 덕분에 한때 식목일의 단골 나무로 이 땅의 황폐지를 복구하는 '모범나무'의 대접을 받았다.

가위바위보로 손가락을 튕겨 잎사귀를 하나씩 따내던 연인들의 놀이는 당시 일상의 풍경이었다. 1976년에는 '아카시아 껌'이 출시돼 히트상품이 되기도 했다. 너무 과한 번식력은 화(禍)가 되었다. 아카시는 주변의 나무를 죽게 하는 골칫덩어리로 전락했고 뿌리가 관을 뚫고 들어가 조상 묘를 황폐하게 만드는 불경을 저지르는 '나쁜 나무'로 인식되었다. 혹자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의 강토를 망치게 하려고 몹쓸 나무를 심었다고 주장했다.

홀대받던 아까시는 90년대 말 '숲가꾸기 공공근로사업'이 시행되자 제일 먼저 베어지는 신세가 되었다.

최근 꿀벌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벌이 사라지자 과수농가도 비상이다,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4년 내 멸종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아카시는 대표적인 밀원(蜜源)식물이다. 집 나간 꿀벌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아까시 나무를 다시 심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문득 재개발로 철거 중인 숭의동 109번지 아름드리 아카시 나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이미 이 동네는 꿀벌에 앞서 사람들이 집 나간 지 오래되었다.

▲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