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학교 출신입니다. 1992년 졸업했으니 딱 30년 됐습니다.

제물포고등학교는 일개 고등학교가 자리잡고 있기에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참으로 훌륭한 부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이 지긋한 인천분들 아니면 잘 모르는 '웃터골'이라는 지명을 가진, 한때 공설운동장이었으며 인천청년 운동의 발원지였습니다.

고일(高逸) 선생은 <인천석금>에서 웃터골이 인천청년 운동의 발원지로 민족혼의 씨를 뿌렸고 민주주의 묘목을 심었으며, 항일정신을 드높이 들어 8·15 광복의 첫 장을 연 인천의 애국 투사들이 육성된 곳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구도(球都) 인천의 상징이었던 유명한 야구단 한용단도 웃터골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웃터골은 1920년 공설운동장으로 변신해 엄복동, 조수만이 참가한 초기 자전거 경주대회부터 각급 학교 운동회, 연합 체육체전이 벌어지곤 하던 종합운동장으로 변신했습니다. 1935년 인천중학교가 개교하면서 공설운동장은 숭의동으로 자리를 옮겨 가게 됩니다.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는 웃터골을 이루는 응봉산은 그리 크지 않은 산이었지만 인재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 밝혔습니다. 현재 박남춘 인천시장, 직전 유정복 시장을 비롯한 여럿의 장관과 십수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전국적 명문으로 꼽혔습니다. 불과 20여년전까지 말입니다.

고교 시절 2000명이 넘던 학생수는 이제 채 500명 남짓으로 폐교를 걱정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평준화를 대변하던 소위 '뺑뺑이'가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선지원 뺑뺑이'로 정책적 변화를 맞으면서 학생수 급감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남구(미추홀구) 주안에 살던 저처럼 1시간 가량 전철, 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시절의 '뺑뺑이'가 아니라 학교를 먼저 지원하고 이를 추첨식으로 선발하는 정책의 변화는 매일 1∼2시간 통학의 부담을 덜 수 있는 의미있는 변화였습니다. 그래서 도시의 변화에 따라 학교들의 운명도 갈라지게 됩니다. 학교와 학생들의 노력보다는 '지역적 특성'이 '명문'을 가르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2021년 6월 중구는 약 14만명, 동구는 약 6만5000명으로 30만~50만명에 달하는 인천지역 다른 구에 비해 인구 규모가 매우 적은 편입니다. 따라서 중구와 동구 통합은 인천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개편안으로 꼽힙니다. 전체적인 여론은 중구와 동구가 통합해야 한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해당 지역 정치인들과 일부 주민들의 반발이 격렬해서 통합이 번번이 무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동구가 중구로 흡수되는 방식으로 통합될 가능성이 높아 동구의 반대가 거센 것이 사실입니다. 중구와 동구가 통합해도 약 20만명 가량에 불과해 40만~50만명 되는 다른 구에 비해 여전히 인구는 매우 적은 편입니다.

여기에 14만175명의 중구 인구 중 영종·용유지역은 9만5378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68%가 넘는 인구가 영종국제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물포고교를 비롯한 박문여고 등 중구와 동구지역의 학교 이전이 불거질 때마다 중구·동구 일부 정치인들이 내세우고 있는 '원도심 붕괴 가속화'는 학교 몇 개를 더 갖고 있다고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행정개편과 이를 통한 도시개발 계획을 갖고 있어야 해결될 수 있는 사안입니다.

원도심을 대표하는 제물포고가 신도심을 상징하는 송도로 이전하는 것이 문제라면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국제도시로의 이전은 어떨까요? 그리고 일개 고등학교가 자리하기에는 역사적 지리적 함의가 함축된 웃터골에는 중구·동구를 통합한 가칭 제물포구청이 자리하는 것은 어떨까요?

1876년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으로 인천의 개항이 결정되고 1882년 제물포조약으로 일본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설정되면서 1883년 1월 인천항의 강제개항이 시작됐습니다. 근대화의 아픔을 딛고 스스로 하늘길을 열어 젖힌 인천국제공항을 배경으로 제물포고가 다시 한 번 전국적 명문으로 거듭나고 중구·동구의 종합적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는 통합 제물포구로의 변신! 한 번 고민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마침 내년에 대선과 지방선거가 있으니 논의를 서둘러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김칭우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