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 일변도 정책에 바다의 낭만도 파묻혔다


어판장·어선부두·연안 객선부두
인천항 제2도크 건설로 사라지자
도크 남측에 군소부두 합쳐 신설

수출입국이 국가 이념이던 시대
효율성 앞세워 감정·정서는 무시

가요 '연안부두' 작사가 조운파
냉혹하고 계산적인 이미지에 불만
정감 있고 푸근하게 그린 가사 공감

시간 지나며 배후 부지 필요성 비등
항만 기능-도시 기능 상충 비효율
▲ 을씨년한 내항 이면 도로. 연안부두로 가기 위해 승용차들이 다니기도 하는 길로 주로 화물차가 이용한다. 부두 진출입로 문제 해결 또한 연안부두가 관광지로 발전하는 데 중요 요소일 것이다. /사진제공=김보섭 사진작가
▲ 연안부두 해양광장. 부두를 찾는 시민들에게 볼거리와 휴식을 제공하는 쉼터이다. /사진제공=인천광역시 중구 홈페이지
▲ 인파로 가득한 연안부두 어시장 풍경. 실수요자들에게는 각종 어물의 구매, 원근의 관광객들에게는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어시장 주변 경관의 시급한 정비일 것이다. /사진제공=김보섭 사진작가
▲ 조운파 작사, 안치행 작곡, 김트리오가 불러 널리 알려진 가요 '연안부두' 노래비. 1979년에 발표된 뒤, 꼭 20년 후인 1999년에 연안부두에 세워졌다. 공교롭게도 이 노래비가 이 부두에 조성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원 안에 서 있는 모양이 되었다. /사진제공=인천광역시 중구 홈페이지
▲ 연안부두하면 누구라도 금세 떠올리는 것이 싱싱한 생선회일 것이다. 대규모 회센터의 개점식을 알리는 1997년 8월31일자 조선일보 기사. /사진제공=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
▲ 미명(未明) 속의 어선부두. 1970년대 중반 제2도크 건설로 내항에 포함된 하인천역 남서편에 있던, 과거 경기도어업조합 부두는 물론 만석부두, 화수부두 등에 선적(船籍)을 두었던 어선들은 모두 이 부두로 이전했다. /사진제공=김보섭 사진작가
▲ 연안부두에 소재한 수협중앙회 인천공판장 내부. 이른 새벽 어선이 싣고 들어온 싱싱한 어물들을 경매하는 광경이다. /사진제공=김보섭 사진작가
▲ 물결 잔잔한 연안부두 여객선 잔교 풍경. 잔교 끝 쪽에 도서 지방을 운항하는 쾌속선도 보인다. /사진제공=인천항만공사 블로그

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는 /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 오는 사람 가는 사람 / 마음마저 설레게 하네. /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 바람이 불면 파도가 울고/ 배 떠나면 나도 운단다 / 안개 속에 가물가물 / 정든 사람 손을 흔드네 / 저무는 연안부두 떠나는 불빛 / 홀로선 이 마음을 달래주는데 /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김트리오가 불러서 널리 알려진 가요 '연안부두'의 가사이다. 인천 사람은 물론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들어 귀에 익은 노래일 것이다. 프로야구 SSG랜더스 팀 이전, 인천 연고팀 SK와이번스 시절에는 야구장에서 응원가로 불리는 것을 듣곤 했다. 새 팀의 응원가로도 불릴 것인지…

이 노래가 가진 전문적, 음악적 성취 여부를 떠나, 정한이든, 낭만이든, 일단 연안부두가 풍기는, 최소한이라도 그 어떤 한 모퉁이 정서만은 배어 있어 우리로 하여금 쉽게 따라 부르게 한다.

그런 점에서 1954년, 인천 출신 가수 박경원(朴慶遠) 선생이 불러 히트한 '이별의 인천항' 이래 인천항을 노래한 대표적인 가요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지… 물론 고인인 배호 가수의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라는 노래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 노래 가사를 이렇게 서두에 옮긴 이유는 분명 이런 점 때문이다. 물론 작사가 조운파(趙雲坡)씨의 작시(作詩) 동기가 자못 공감을 불러일으킨 까닭도 있다. 그 '공감'의 내용이 1990년 11월29일자 '고도성장의 뒤안길, 잊혀진 낭만'이란 제하의 조선일보 기사에 실려 있다. 이 기사는 당시 연안부두의 이모저모를 특집 형태로 다루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아내에 바치는 노래…로 이름을 날리던 작사가 조운파(趙雲坡, 본명 趙大元)씨가 가요 '연안부두'를 만든 것은 그 몇 해 뒤인 1979년 봄. 황량한 매립지 위에 덩그렇게 혼자 서 있던 이 부두 주변으로 하나 둘 횟집들이 들어서 뱃터로보다 오히려 횟집동네로 더 이름이 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경제 발전과 함께 어딜 가나 수출, 수출하던 1970년대 말은 어찌 보면 바다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던 시절이었습니다. 수출 선박도 바다로, 원양어선도 바다로, 하는 식이었죠. 아마 바다에 대한 이미지가 그때처럼 냉혹하고 계산적으로만 받아들여지던 시기도 따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할까요. 그런 메마른 모습 말고 좀 더 정감 있고 푸근한 바다를 그려보자는 생각에서 만들어본 게 '연안부두'였습니다.”

 

인용문의 후반부 내용이 조운파씨가 가요 '연안부두'를 작사하게 된 동기를 직접 실토한 부분이다. 본 연재 제35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언급을 한 바 있으나, 연안부두가 건설될 당시의 최선은 오로지 수출입국, 고도성장뿐이어서 그 길로만 '줄달음쳐' 오던 때였다. 그러니까 인천항 제2도크 건설도 당연히 당시 국가 이념이다시피 했던, 나라 경제의 부흥만을 담당키 위한 안목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연안부두 또한 그와 같은 안목과 기준에 의해 건설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인천역 남서편의 어판장을 비롯해 어선부두, 연안 객선부두는 모두 제2도크의 내부가 된 오늘날의 제1부두 일부와 제8부두 자리에 있었다. 제2도크가 몇만t급 거대 선박의 수출입 화물을 하역하는 산업항으로 설계된 까닭에, 우선 그 출입구인 갑문을 500t 미만의 연안 여객선이나 어선 같은 소형 선박들은 통행할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통행은커녕 이들 선박들이 닿던 부두 자체가 사라져 버린 마당이었다.

결국 소형 선박만을 위해 전용 항구로 제2도크 남측에 새로 건설한 항구가 연안항이었다. 여기에는 관용부두(官用埠頭)와 함께 제1도크 시절 인천항 주변에 산재해 있던 군소 부두들을 통합해 선박 관리와 여객 운송, 화물 처리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런 목적으로 태어난 항구이고, 부두였으니 애초 그 누구 하나 여기를 세상이 감탄할 만한 미항(美港)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가졌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매립으로 얻은 황무지에 우선 급한 것 먼저, 돈 되는 것 먼저, 수치(數値)로 표시할 수 있는 것 먼저, 큰 밑그림에 따른 차근한 판단 없이 돌격하듯 세워 나갔던 것이다. 시대가 그랬고, 의식이 그랬으니, 바다를 느끼는 사람의 감정이나, 부두의 정서 같은 것을 운운할 계제는 더더욱 아니었으리라.

정감 있는 항구 건설은 차치하고서라도, 결국 항만과 배후 부지의 효율성 면에서도 말할 수 없는 불편과 마찰이 뒤따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연안부두 일대였다.

 

육상 하역 장비의 등장과 선박의 대형화, 항만 이용 패턴의 다양화 등 항만의 기능과 기술 수준 및 수요의 변화로 갑문항이 완성된 지 몇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갑문항 중심의 인천항은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특히 항만에서의 부가가치 활동 수요가 증가하면서 항만 배후 부지가 점점 많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도시의 발전에 따라 도시 용지 부족으로 항만 배후 지역에 아파트 등 도시 시설이 들어서면서 항만 기능과 도시 기능이 상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충 문제는 인천항의 관리 주체인 해운항만청과 배후 도시의 관리 주체인 인천광역시의 관리 주체 간 업무 협조가 원활하지 않아 이후 인천항의 항만 배후 산업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렇게 인천항만공사에서 펴낸 '인천항사'의 내용을 들춘다. 연안부두의 알려진 아파트의 입지와 환경이 바로 '항만 기능과 도시 기능이 상충하는' 뼈아픈 단견(短見)의 결과였다. 더불어 세인이 다 짐작하고 있듯이 서해사거리 인근의 두 아파트 단지 또한 '인천항사'가 지적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도 항만도 옴쪽하기 어렵고, 숨쉬기가 힘들어진 이 무책(無策)!

오늘날의 우리는 언필칭 '연안부두시대'를 운위한다. 이 부두가 늘어난 연안 항로의 기점이면서 도서지방의 교두보임을 말하고, 넓은 여객터미널과 쾌속선의 등장을 말하고, 한중(韓中) 페리호 같은 국제 여객 항구임을 거론한다. 또 어항과 어시장과 흥청거리는 대규모 횟집들과 센터를 말한다. 거기에 친수공간의 울긋불긋한 위락시설들도 꼽는다.

물론 1970년대 중반까지 하인천역 남쪽, 서쪽의 초라했던 부두 시절을 생각하면 가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살벌하다는 느낌뿐인 출입 교통 문제, 부두 배면에 널린 건조한 느낌의 시가지와 여기저기 항만 관련 시설, 장비 등과의 상충 문제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다시 차근차근 되돌아볼 문제라는 생각이다.

다 내놓더라도 연안부두 일대에서만은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누구라도, 일년 삼백예순날, 늘 활발하면서도 여유롭고, 평화로우면서 안락하며, 곱고 정감 넘치는 바다와 항구와 잘 정비된 도시를, 눈에 넣고 가슴에 품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운파씨가 노래 가사 '연안부두'를 지은 본심이었을 것이다.

 

/김윤식 시인·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