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교육은 허학 일색…배움과 삶 일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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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일록> 제5책에 보이는 ‘농가총람’ 부분. 선생은 첫 줄에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을 인용하였다. “‘나라에 9년분의 비축된 양식이 없으면 부족하다’하고 ‘6년분의 비축이 없으면 시급하다’하며 ‘3년분의 비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다’라 한다.”가 보인다. 코로나 19로 비어가는 나라 곳간이기에 새삼스레 글줄이 무겁다.
▲ <천일록> 제5책에 보이는 ‘농가총람’ 부분. 선생은 첫 줄에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을 인용하였다. “‘나라에 9년분의 비축된 양식이 없으면 부족하다’하고 ‘6년분의 비축이 없으면 시급하다’하며 ‘3년분의 비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다’라 한다.”가 보인다. 코로나 19로 비어가는 나라 곳간이기에 새삼스레 글줄이 무겁다.

이 지면을 통해 2019년 1월, 연암 박지원을 시작으로 다산 정약용, 혜강 최한기, 고산자 김정호, 동무 이제마, 풍석 서유구, 문무자 이옥, 수운 최제우, 담헌 홍대용을 거쳐 우하영 선생을 연재하고 있다. 실학을 주창한 이분들 삶이 대부분 현실과 어그러진 고달픈 인생일지라도 이름 석 자는 그래도 아는 이가 꽤 된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우하영'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꽤 섭섭한 일이기에, 다른 분들에 비해 선생에게 연재 횟수를 더 할애하니 독자들께서는 혜량해주셨으면 한다.

제5책이 계속 이어진다. '산지광점폐'(山地廣占弊)는 조상 묘에 대한 폐단이다. 지금도 산소를 쓰는 데는 길지를 따진다. 저 시절 세력 있는 가문과 고을 토호들은 권력을 앞세워 자기 조상의 묘로부터 5~6리까지는 다른 사람의 묘가 들어서지 못하게 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산소를 넓게 쓰는 광점(廣占, 땅을 넓게 차지함)의 폐단을 지적한다. 지금도 땅 투기와 아파트 평수 늘리기에 온 정성을 들이는 우리네 저속한 의식을 보자니 꽤나 긴 역사이다. 이 글에서 선생은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근래 고질적인 폐단은 고치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필시 빠른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데 있다. 이것은 농사도 짓지 않고 풍년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빠른 효과를 도모하는 해악은 심은 모를 들어서 자라게 하려는 사람과 같다.”

우리의 '빨리빨리 습성' 또한 저 시절에도 이미 저렇게 존재했다.

'노예'(奴隷)에서 선생은 중국은 노비를 대대로 전하지 않는데 우리는 대대로 전하고 매매까지 한다며 이는 “사람이 가축과 맺는 관계”(若人之與畜物者然)라고 통매하였다. '충의'(忠義)는 곽재우, 김천일 같이 나라에 충의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선생은 특히 의병에 주목하였다. “천 명의 의병을 불러 모으는 것이 만 명의 병사를 징발하는 것보다 낫다”는 옛사람의 말을 인용하며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이 온전히 '의병의 힘'이라고 하였다.

'금개가'(禁改嫁)에는 '노예' 항에서 보였던 인(仁) 사상이 다시 나타난다. 선생은 개가 문제를 지적하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견해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에 “영불서용(永不敍用, 죄를 지어 영구히 등용되지 못하는 자), 재가한 여자, 조행(操行, 태도와 행실)을 상실한 여자의 자손 및 서얼의 자손, 그리고 장리(贓吏, 탐관오리)의 아들에게는 문과와 생원 진사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장리부터 짚어본다. 유수원은 <우서> 권1, '논본조정폐'에서 “장리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관리로 나가는 데 장애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지금도 부조리한 삶으로 획득한 부모의 부와 권력을 대를 이어가며 갑질하는 보도를 자주 본다. 연면한 전통이지만 폐기처분 대상임이 분명하다. 특히 여인의 수절에 대한 선생의 서술은 참담하다.

“젊은 여자가 봄을 원망하며 홀로 빈방을 지키면서…다만 자기 집안에 누를 끼친다는 것 때문에 감정을 억누르고 억지로 수절한다. 음란하고 더러운 행실이 말할 수 없는 곳에서 나오거나 또 어떤 이가 그를 더럽히면 소문이 날까 봐 자취를 지우는 일이 곳곳에 있다. 더욱 참담한 일은 지금 어둡고 으슥한 곳에 갓난아기를 싸서 버리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저 이리 같은 짐승들도 자기 자식을 사랑할 줄 알거늘, 비록 무식한 촌 여인이라도 어찌 자신의 소생을 사랑할 줄 몰라서 이러하겠는가. 그 아이가 더러운 행실에서 나왔기에 혈육을 버려서 은혜를 주지 않고 윤리를 상하게 하여도 아무도 측은히 여기지 않으니 이게 어찌 천지가 만물을 낳은 인(仁)이란 말인가?”

이러고는 “원래 절개를 지키는지 여부는 오직 그 사람에게 달려 있지, 법으로 억지로 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하며, 그래도 나라 법은 하루아침에 고치기 어려우니 절충방안을 마련하자고 한다. 즉 '개가한 여자의 자손이 청요직(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막는 법은 대수를 한정하고 여항의 미천하고 원통한 청상과부들이 수절하든 개가하든 스스로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농가총람'(農家總覽)은 농사법이다. 선생은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선생은 이 글을 쓴 이유를 “오늘날의 계절과 기후가 옛날 같지 않고 민간의 기술도 달라져서”라 한다. 전에 나온 농서는 이미 당시 현실과 맞지 않게 되었으니 예전부터 전래되어오는 농사 방식을 소개하고 자기의 경험을 기록하여 농촌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농가집성>(農歌集成)과 <농사직설>(農事直設)의 원문을 인용하고는 자신의 견해를 주석처럼 달았다. 그러고는 '부관'(附管)이란 항에 자신의 견해를 매우 상세하게 적어 넣었다. 이는 선생이 직접 농사를 지은 데서 연유하니 '종자마련'(備穀種)이라는 항목만 보면 이렇다.

“직설: 다음 해에 어떤 종자가 좋은지를 알아보려면 아홉 종의 곡식 씨앗 각 한 되씩을 각기 다른 베주머니에 담아 흙으로 지은 움막 안에 묻어라(사람들이 그 위에 앉거나 눕지 못하게 하라).

부관: 이 방법은 일찍이 우리 집안에서 이미 시험해보았다. 각각의 종자 한 되씩을 각각 다른 베주머니에 담기는 어려우니 종자 1홉씩을 취해서 각기 다른 베주머니에 담는 게 낫다. 흙으로 지은 움막은 필요치 않으며 그 대신 북쪽 담장의 그늘진 곳에 묻는 게 좋다.”

선생은 이렇게 직접 농사지으며 얻은 지식을 조목조목 정리하였다. 학문을 하고 농사를 짓는 실학자의 글답다. 지금도 우리 교육은 이론 중심의 허학(虛學) 일색이다. 배움과 삶이 일치하는 실학시대(實學時代)의 도래를 꿈꿔본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