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처음으로 여행한 것은 1968년 신문사 초년병 시절이었다. 대학때부터 관계하고 있던 세계청년회의(WAY) 연차 총회가 네덜란드의 아른험(Arnhem)에서 열렸는데 왕복 항공표와 체제비가 지원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네덜란드 동부지역 라인강 지류에 위치한 아른험은 2차 대전의 격전지였다. 회의 도중 주최측은 근처 오텔로(Otterlo)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크륄러 뮐러 미술관으로 안내했는데 규모나 소장품이 놀랄만한 수준이었다. 특히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 윤재우(1917~2005) 화백으로부터 형제간의 우애와 불우했던 천재 화가로 듣고 알고 있었던 빈센트 반 고흐의(1853~1890)의 작품이 많아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후 프랑스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면서도 반 고흐의 작품을 관람하고 그가 프랑스에서 지내는 동안 거쳐갔던 곳들을 찾아보면서 고교시절 은사였던 윤 화백께 그림 엽서들을 보내드리기도 했다. 남불 프로방스 지방에서 지내던 아를과 생 레미드 프로방스를 여러 차례 찾았고 반 고흐가 3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오아즈는 친지들을 안내해서 십여차례 이상을 갔었을 것이다.

▶지난주 뉴욕타임스 부록에는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명 작가에 가까웠던 그를 세계적인 화가로 등극시킨 제수 조 요한나에 대한 장문의 심층 분석기사가 실렸다. 그동안 무명작가 반 고흐를 일생 지원했던 아우 테오와 그의 반려자 조의 역할과 기여는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난 15년 동안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과의 연구계약으로 902통에 달하는 반 고흐와 동생 테오간의 서신 그리고 수많은 다른 자료들을 분석 검토한 한스 라위튼씨는 제수 조 요한나야말로 무명화가를 세계적인 화가로 만든 전략가였다고 결론지었다.

▶형 빈센트가 생을 마감한 후 반년만에 숨을 거둔 테오의 부인 조는 850여점의 작품과 1500여점의 스케치 그리고 형제들이 나눈 편지들을 파리에서 네덜란드로 가져왔다. 조는 작품을 한 점 한 점 살피고 형제간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고흐의 천재성과 고흐의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감상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자각했다. 그녀는 파리, 베를린, 코펜하겐의 화랑에서 차례로 전시회를 열었다.

▶1905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이어서 1916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회로 반 고흐는 세계적인 화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1914년에 발간된 서한집과 함께 조는 테오의 무덤도 프랑스에 있는 형 빈센트 옆으로 옮기면서 묘비도 같은 크기와 내용으로 만든 후 1925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35년간에 걸친 조의 활약으로 반 고흐는 드디어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고 1932년에는 어빙 스톤의 자전적 소설이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사랑받는 작가가 되었다.

 

/신용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