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인천박물관 한바퀴] 25.인천근대박물관
[다함께 돌자! 인천박물관 한바퀴] 25.인천근대박물관
  • 장지혜
  • 승인 2021.04.13 19:16
  • 수정 2021.04.13 19:15
  • 2021.04.14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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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개항직후 인천' 향수 부르는 유물 빼곡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으로 가는 길목에 오래되고 진귀한 유물들이 가득한 곳이 있다. 인천근대박물관은 고(故) 최웅규 관장이 생전 40~50년간 수집한 근대 생활사 자료 가운데 특히 인천에 관련된 것을 주요 유물로 정리해 2010년 8월13일 문을 열었다. 현재는 그의 아내인 정유순 관장이 박물관을 도맡아 운영하고 있다.

▲ 1883년 인천 역시 개항 당시 외국에서 수입된 비누, 치약, 칫솔, 면도기, 넥타이, 안경이 전시돼 있다.
▲ 1883년 인천 역시 개항 당시 외국에서 수입된 비누, 치약, 칫솔, 면도기, 넥타이, 안경이 전시돼 있다.
▲ 개항 이후부터 점차 변화해온 불조심 표지판들.
▲ 개항 이후부터 점차 변화해온 불조심 표지판들.

▲시간 멈춘 듯 오래된 옛것

19세기 중엽 이후 우리 민족은 밖으로는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했고 안으로는 전근대적인 봉건체제를 극복해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일본의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강압적 요구로 체결한 병자 수호조약을 통해 문호를 자의가 아닌 타의로 개방했고 각종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들어와 신구제도 교체에 의한 마찰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웠다.

1883년 인천 역시 개항 이후 새롭고 다양한 서구 문물이 유입됐다. 인천에 들어온 외국 물건들은 한국에서 최초로 사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근대박물관은 개항 당시 영국 영사관에서 사용했던 목제 장식장, 서양인이 가져온 안경, 비누, 면도, 시계, 여행 가방, 나무 냉장고, 재봉틀 등 개인이 어렵게 수집한 물건을 보유하고 있다.

외국 무역상이 조선에서 판매하기 위해 수입한 염료, 바늘, 의약품 등 값지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인천근대박물관에선 근대 이후 우리 생활 변천사도 알 수 있다. 관보와 태극기, 경인선 기차표, 카메라, 사진, 지도, 성냥, 전화기 등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근대생활사 자료도 다수 전시돼 있다.

▲ 송화기와 수화기가 분리된 수동 자석식 전화기로, 벽에 부착해 사용하는 벽걸이형이다.
▲ 송화기와 수화기가 분리된 수동 자석식 전화기로, 벽에 부착해 사용하는 벽걸이형이다.

▲영국영사관 장식장

인천근대박물관 소장품 중 110년이 넘은 장식장이 하나 있다.

이 장식장은 1890년대 영국에서 인천으로 들여온 것이다. 지금의 올림포스 호텔 자리에 있었던 영국영사관에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형 장식장은 오래된 단풍나무를 사용해 독특하고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넣고 세련된 위용을 뽐낸다. 지금도 흠잡을 데 없이 새 것 같은 견고함을 자랑한다.

▲ 1945년 8·15광복 후 처음으로 한국 사람의 손으로 인천에 대한성냥을 비롯해 전국에 300여개의 수공업 형태의 공장이 설립돼 월간 400만 포의 성냥을 생산공급하기도 했다.
▲ 1945년 8·15광복 후 처음으로 한국 사람의 손으로 인천에 대한성냥을 비롯해 전국에 300여개의 수공업 형태의 공장이 설립돼 월간 400만 포의 성냥을 생산공급하기도 했다.

▲인천 성냥

인천근대박물관엔 오래된 성냥을 전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밀려들어오는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1883년 인천 개항 당시 서구의 무역상들이 인천을 기점으로 다양한 외래 문물을 수입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성냥이 국내 처음 소개된 것은 1880년 일본신사 유람단으로 동행했던 개화승 이동인이 수신사 김홍집과 귀국할 때 처음으로 성냥을 가지고 들어오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우리나라는 당시만 해도 강철 편을 차돌에 부딪쳐 생기는 불꽃을 쑥에 점화시켜 불씨를 얻는 방법으로 불을 만들었다.

성냥이 생활용품으로 대중화된 것은 1917년 일본인들이 인천에 조선성냥㈜을 설립하면서부터였다.

제물포를 중심으로 성냥공장이 생긴 것에는 이유가 있다. 조선인촌주식회사는 지금의 동구 금곡동에 설립됐는데 서울과 경기지역의 넓은 배후시장과 함께 함경도나 평안도 등에서 생산된 목재를 압록강을 거쳐 인천으로 들여오기 쉽기 때문이었다.

당시 성냥공장은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산업이었다. 이 성냥공장은 신의주에 직영 제재소까지 뒀는데 직원만 500명이고 섬세한 수공업 노동이 요구되는 이유로 특히 여성 직원이 많았다.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은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인천의 성냥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서울의 마포성냥공장이 본인들의 성냥 상표를 '인천성냥'으로 부를 정도였다.

이곳에서 패동, 우륵표, 쌍원표 등의 성냥을 7만갑 정도 생산했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인천의 대한성냥, 연합성냥, 인천성냥 등 회사가 성냥을 생산했지만 1980년대 들어 가스라이터가 대중화되면서 인천의 성냥공장들은 모두 문을 닫거나 라이터 제조업으로 전환했다.

이렇게 한 시대에 불씨를 꽃 피웠던 인천의 성냥공장은 막을 내렸고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경북 의성 성냥공장도 2018년 11월1일 폐업했다.

근대화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들어와 한때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성냥이 이제 시대 흐름속에서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이런 성냥에 고 최웅규 관장은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 사방팔방 성냥을 수집하러 다녔다.

그 수만 해도 엄청난데 인천근대박물관은 그 중 약 1만5000점의 성냥과 성냥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정유순 인천근대박물관 관장]

“좋아하는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운영하자 싶었죠”

▲ 정유순 인천근대박물관 관장
▲ 정유순 인천근대박물관 관장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보여주자, 그렇게 다짐했죠.”

정유순 관장은 남편인 전 최웅규 관장이 별세한 이후 이 박물관을 유지해야 할지 고민했다.

개인의 엄청난 열정과 하나하나 자식 같은 유물들이 모여있는 곳이지만 사립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초등학생 한 명이 와서 성냥에 관심이 많다며 몇 시간을 보고 가더라고요.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값진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소구나 생각해 박물관을 계속하기로 결심했죠.”

정 관장은 남편이 살아생전에 근대 자료를 컨테이너에 실어서 미국 로스앤젤레스(LA)까지 가지고 가 전시회를 열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 시대의 가치를 기억해야 한다는 열의 만큼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어요. 유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치 않고 가서 수집했죠.”

부평구에 살던 부부는 개항장 근처 중구 조계지 길을 좋아하며 자주 찾았다가 지금의 박물관 자리를 얻었다.

넘쳐나는 소장품을 정리하고 다른사람과도 공유하겠다고 마음 먹은 후 인천근대박물관이 탄생했다.

“지나온 역사지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근대사를 박물관에서 한눈에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앞으로 침략사에 관한 기획 전시도 진행할 계획입니다.”

/글·사진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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