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광역시 진입...끝나지 않은 성장통


강화 등 통합으로 10개 군구 완성
제1회 지방선거로 자치시대 개막

도시팽창 인한 환경·교통문제 등
해결 기대 불구 아직 요원한 상황

21세기 인천의 시작점은 1995년이다. 그해 3월 도시가 팽창했고, 1991년 지방의회 부활에 이어 34년 만에 지방자치단체장도 시민 손으로 뽑았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개발 광풍이 불기 시작한 그해, 인천은 심한 성장통을 앓았다. 공업도시 인천은 '회색도시'라는 듣기 거북한 닉네임이 꼬리표처럼 붙었다. 여기에 비리·횡령, 환경 논란, 문화 인프라 부족 등은 240만 인천시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그렇게 인천시의회는 2·3대 시의회가 개원되며 인천형 지방자치를 본궤도에 올려 시민 행복을 어떻게 하면 끌어올릴까 고민했다.


1991년 인천직할시 시의회로 30년만에 지방자치가 부활했고, 1995년에는 인천광역시 시의회로 제2대 시의회가 개원했다. 지역이 커지며 시의원이 늘었고, 인천의 각종 현안 해결에 노력했다.  그리고 시의회 여성들에게 높기만 하던 유리천장이 깨진 계기가 됐다. /사진제공=인천시의회
1991년 인천직할시 시의회로 30년만에 지방자치가 부활했고, 1995년에는 인천광역시 시의회로 제2대 시의회가 개원했다. 지역이 커지며 시의원이 늘었고, 인천의 각종 현안 해결에 노력했다. 그리고 시의회 여성들에게 높기만 하던 유리천장이 깨진 계기가 됐다. /사진제공=인천시의회

1896년 경기도 인천부, 1981년 인천직할시, 1995년 인천광역시.

1995년은 10개 군·구 인천이 완성된 원년이자 34년만에 지방자치가 전면 실시된 해이다. 그해 3월1일 경기도 강화·옹진군, 김포시 검단면이 인천광역시에 통합됐고, 6·27 제1회 동시지방선거를 통해 인천광역시장, 10개 군·구청장, 인천광역시의원, 10개 군·구의원을 뽑았다.

당시 인천시민들은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요 중앙집권적인 권위주의형 관치행정에서 지방분권적인 주민참여형 자치행정으로 전환하는 계기점”이라고 평가 했다.

지방자치시대 '인천'은 중대 기로에 서 있었다. '수도권 변방의 서울 위성도시로 자족할 것이냐, 황해의 중심지로 동북아시대의 관문 역할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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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잇고 산을 깎은 인천국제공항, 부산에 뺏긴 제1항구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는 인천국제항, 바다를 메꿔 첨단 도시로 거듭할 송도 정보통신기지. 인천은 '트라이포트'라는 구상 속에 동북아 물류교통 허브를 자청했다. 그래서 1995년 전면 지방자치시대는 인천에게 기회였다.

하지만 인천은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관치가 아닌 민치였기에 고질적인 '인천병'을 뜯어고칠 수 있을거라 여겨졌다. 여전히 인천은 경제·사회·문화·교통 등 모든 분야가 서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일제시대부터 이어진 급속한 산업화와 중화학 공업으로 인천은 '회색도시'라는 최악의 오염 도시로 전국이 인식했다.

심지어 정부가 밀어붙인 굴업도 핵폐기장 설치와 영흥도 화력발전소 건설은 인천시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1994년 터진 북구청 세무횡령사건은 인천의 부정적 이미지를 전국에 각인시켰다. 서구 경서동 인천매립지(현 수도권매립지) 문제는 수도권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던 인천의 현실과 그로 인해 시민들이 받은 상처는 컸다.

IMF 사태를 맞은 이듬해인 1998년, 제2회 동시지방선거가 개최됐다. 경제가 파탄됐고, 인천이 휘청거렸다. 매립지·소각장·발전소 등 환경 문제는 해결되지 못해 난제가 됐고, 군 관련 시설을 놓고 시민 저항이 거셌다. 1991년부터 시작된 지방자치시대가 해를 거듭하며 시민 주권의식이 성숙해졌다. 이에 불편·부당한 시 정책을 과감히 깨뜨리고, 정부 정책이 맞서며 과거와 현재를 거울삼아 미래 세대에게 더 나은 인천을 물려주기 위한 시민·사회·여성 운동 등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주영·김원진·이창욱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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