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환하게 피어오른 '부활의 미소'
▲ 영화 '사울의 아들' 중 사울이 소년의 시신 앞에 서있는 장면.
▲ 영화 '사울의 아들' 중 사울이 소년의 시신 앞에 서있는 장면.

“랍비라고 널 이 지옥에서 구해줄 거 같나?”

나치의 학살수용소 아우슈비츠의 비밀 작업반 '존더코만도' 소속의 유대인 사울은 랍비를 애타게 찾는다. 가스실에서 막 죽은 시체들을 처리하느라 바쁜 동료들 틈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동료들은 언제 가스실 행이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죽은 소년 장례를 치러주겠다고 랍비를 찾는 사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화 '사울의 아들'(2015)은 1944년 10월 실제로 일어났던 아우슈비츠 역사상 유일의 저항인 존더코만도의 반란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참상을 생생하게 담아낸 헝가리 신예 감독 라즐로 네메스의 데뷔작이다. 감독은 카메라의 시선을 주인공 사울에게로 극도로 제한한 핸드헬드 촬영기법과 현장감을 극대화시킨 사운드의 운용을 통해 그 끔찍하고 참혹한 현장 속으로 관객들을 끌고 가며 충격과 혼란으로 밀어 넣는다.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과 함께 칸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홀로코스트 참상의 재현을 통해 반추하는 '인간다움'의 의미

흐릿한 초점의 숲을 배경으로 형체가 불분명한 움직임이 점점 앞으로 다가온다. 그 움직임은 점차 분명해지며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의 초췌한 얼굴로 구체화된다. 그 남자는 동료와 함께 고개를 돌려 한 무리의 사람들 틈으로 다가간다. 그리곤 흐릿하게 드러나는 무리들을 어딘가로 안내하며 묵묵히 그들 옆을 걸어간다. 때론 그들과 분리된 채, 때론 그들과 섞이며… 영화는 시종일관 존더코만도 소속인 사울의 얼굴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희생자들의 모습을 흐릿한 배경으로 지움으로써 당시 나치에 의해 물화(物化), 추상화된 유대인들의 처참한 상황을 드러낸다. 히틀러는 인간 존재의 최고의 목적이 '종의 보존'이라면서 독일 민족의 뿌리인 아리안 인종을 문명창조자로서 가장 우월한 인종으로 치켜세우며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 집착했다. 그래서 자신이 열등한 인종이자 문명파괴자로 낙인찍은 유대 민족을 절멸시키는 데 끝까지 총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세워진 학살수용소에서 수많은 희생자들은 고도의 산업화·전문화·관료화된 체제에 의해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주인공 사울은 나치의 명령에 굴복해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던 중 '토막들'로 불리는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소년을 발견한다. 그러나 소년은 나치 감독관에 의해 결국 질식사하고 부검의에게 맡겨진다. 시신을 빼돌린 사울은 소년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고 싶어 랍비를 찾아 헤맨다. 그 소년이 자신의 아들이건 아니건 그건 사울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이미 죽은 존재나 다름없는 사울에게 소년은 모세의 기적 같은 한 가닥 구원의 빛이었던 것이다. 그 빛은 그로 하여금 자기보존 본능을 넘어서는 고귀한 정신을 구현하게 하는 힘이 된다. 반란을 틈타 탈출한 사울은 강을 건너다 그만 소년의 시신을 놓친다. 절망의 순간, 그의 앞에 파릇파릇한 생기로 살아 숨쉬는 '소년'이 현현한다. 이제야 사울은 환한 미소로 인사하며 '인간'으로 되살아난다.

하느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새긴 석판을 모세에게 건넸고, 예언자 아모스의 입을 통해 당부하셨다.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시희(SIHI) 베이징필름아카데미 영화연출 전공 석사 졸업·영화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