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 일대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무쌍한 곳이다. 인천 개항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경인철도 개통(1889년)뒤 역을 깃점으로 많은 사람과 물자의 통행을 이끌면서 상권 발달을 촉진했다. 동인천 역세권은 흥청거릴 요소를 두루 갖추고 오랫동안 번창일로를 걸었다. 그러다가 인천시청 구월동 이전과 다른 지역 개발 등에 밀려 쇠락을 거듭한다. 동인천은 인천인들에겐 '마음의 고향'과도 같아, 어떻게든 되살릴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기도 한다.

동인천을 떠올릴 때 용동(龍洞)을 빼놓을 수는 없겠다. 한때 큰 우물 터(인천시 민속자료 제2호)를 중심으로 사방에 유흥을 즐길 만한 업소가 즐비해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용동 일대 술집들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값싸고 풍성한 메뉴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나이 지긋한 연배의 인천인들은 신포동 쪽으로 가기 일쑤였고, 젊은이들은 용동에서 젊음을 발산했다. 요즘은 '놀 수 있는' 데가 지천이지만, 그 때는 그렇지 못한 시절이었다.

이처럼 '먹고 마시는' 용동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故 신태범 박사가 내놓은 '개항 후의 인천 풍경'을 한번 보자. “목로주점과 방술집도 늘어났지만 격이 높은 유흥업소가 등장했다. (미두장으로) 돈을 벌었다고 마시고, 잃었다고 마시고. 술에는 으레 여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씀씀이가 크고 돈 출입이 잦은 미두꾼이 늘면서 요릿집과 기생권번이 생긴 것이다. 일월관, 용금루, 조선각 등이 문을 열고 소성권번이 출현했다.”

권번은 일본에서 온 용어. 기생들에게 춤과 노래, 악기 연주 등을 가르쳤던 일종의 기생 양성소다. 1900년대 후반 국내 관기제도를 폐지하자 기생들은 기생조합을 결성했다. 권번은 오늘날로 치면 대중가수와 배우 등 연예인을 양성하는 공연기획사 역할을 했다. 전국 각지에 설립됐는데, 인천엔 용동권번이 있었다. 인천 옛 이름을 따 소성(邵城)권번으로도 불렀다. 지금도 용동 골목 돌계단엔 '龍洞券番 昭和四年六月 修築'(용동권번 소화4년6월 수축)이라고 새긴 문구가 전해진다. 용동권번과 인연을 맺었던 복혜숙·이화자·이화중선·유신방 등의 유명 '예술인'들은 물산장려운동과 이재민돕기운동 등 지역 사회 일원으로서도 적극 참여했다.

예술숲이 기획·제작한 뮤지컬 <미쓰 수염씨>가 3월6일 송도 트라이보울에서 막을 올린다. 작품은 100년 전 인천 개항장에 실재했던 기생조합 용동권번을 배경으로 삼는다. 조선 연예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여성 공연기획자 '수염씨'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권위적인 세상에 맞서 기생출신 여성스타들을 키워내고 성공시키는 줄거리다.

기생을 달리 이르는 '해어화(解語花·말을 알아듣는 꽃)'에서 알 수 있듯, 한 송이 꽃으로 웃음을 팔았어도 그들은 인천인으로서 우리 음악사를 장식한 인물이다. 용동권번과 그 곳에 몸 담았던 인물들을 새로운 스토리텔링으로 되살린 극단에 박수를 보낸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