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에 이어 또 한번 명절 같지 않은 명절을 보냈다. 이전 같으면 왼종일 고향 동리를 휘젓고 다니며 음복술을 거푸 마시고 세배를 다녔을 시간들. 대신 TV 리모컨만 몸살이 났다. 이곳 저곳 전화를 돌려보니 차례조차 생략했다는 집이 예상보다 많았다. 동생네도 아들네도 안와도 된다 했지만, 혼자서 차례 지낼 기분은 아니더라는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명절이면 저마다 '양반 집안'인 양 차례상 다리가 휘도록 차려댔다. 500년 이상 이어 내려온 그 껍데기 유학의 허세 조차 벗어던진 것이다. 대단한 코로나19의 위력이다.

▶뉴스를 보니 큰 사건사고도 없는 조용한 설이었다. 며느리들의 명절 증후군 얘기도 일절 나오지 않았다. 합법적으로 시댁을 가지 않아도 됐으니 당연하다. 시골 논밭을 둘러싼 형제들간의 싸움도 전혀 뉴스에 오르지 않았던 명절이었다. 유산을 둘러싼 가족간 다툼은 재벌가만 그런게 아니다. 언제부턴가 명절이면 시골 땅을 둘러싸고 형제들간에 칼부림까지 갔다는 뉴스들이 끊이지 않았다. '원래 저런 형제들이 아니었는데'라고들 하지만 거의 예외가 없다고 한다. 이제는 오래 전에 시집을 가 잊고 있었던 딸들까지 뒤늦게 나타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니, 선산을 팔아도 차례 올 것이 없다고들 한다.

▶설에도 TV를 끼고 살다보니, 좀 특이한 광고 하나가 되풀이 나왔다. '당신의 부탁이 신탁이 되다'를 내건 어느 증권회사의 가족유산신탁상품 광고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선진국에서는 일반화된 유언대용신탁이라고 한다. 유언에 따른 상속이나 증여는 그 집행에 있어 가족간 분란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유언대용신탁은 대상 재산의 소유권을 넘겨버리기 때문에 신탁자의 뜻대로 집행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신탁상품 광고의 카피는 영 낯선 느낌이다. '아들아, 내가 부자라고 해서 너도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재산이 너의 의욕을 꺾지 않았으면 한다.' '가족한테 잘해라 돈은 또 벌면 되지만 가족은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단다.' 유언대용신탁에 들면서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들인 모양이다. 아들이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장면에는 이런 카피가 뜬다. '하늘에서 주는 보너스-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 도착했다.' '땀흘려 번 돈의 가치를 알아야-5년간 회사 생활에 성실히 임했을 때 분할 이전되도록 설계됐습니다.' 유산이 아들에게 이전되는 신탁 조건들인가 보다.

▶댓글이나 반응들은 엇갈린다. '늘 자식 걱정하는 부모님 마음이 느껴진다.' '오죽 아들이 못 믿어웠으면…' '세상 참 많이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꼭 공중파 TV에 광고할 상품인건가' 등등. 아무튼 귀에 쟁쟁히 남는 광고임은 맞다. 특히 아비의 재산에 아들의 의욕이 꺾일라 걱정하는 마음 씀씀이 등. 그러나 어쩐지 그냥 들어넘기기엔 좀 불편하다. 별로 물려줄 게 없는 사람들의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