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에 굴하지 않고 투쟁의 불길을 되살리다


석문중 교직원·학생·지역주민, 유해 묻어주고 추모제 열어…2016년엔 '의병의 날' 행사
화성 제암리 출신으로 대한제국군 시위대 복무하다 낙향…을사늑약 이후 화성의병 규합
1906년 8월24일 1차 전투서 가까스로 피신 후 의진 수습…1908년 초 당진 일대서 맹활약
▲ 1982년 석문중학교 교직원 및 학생과 소난지도 지역주민들이 유골을 수습해 만든 의병무덤.

◆ 제6회 '의병의 날' 도비도항에서

2016년 6월1일 '의병의 날', 새벽 2시 반에 일어나서 몸을 깨끗이 씻고 차에 오르니, 3시 반이 가까웠다. 집에서 충남 당진시 도비도항 선착장까지 길찾기를 해보니, 374.1㎞, 4시간21분 소요된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도비도항은 오래전에 대호방조제로 인해 육지로 변해서 그곳에 도착하니,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포구는 한산하기만 했다. 빵과 우유로 허기를 채우고 나니, 추모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전세버스로 내려온 최구현(崔九鉉) 의병장 손자 사묵(思默) 옹, 순국선열유족회원과 의병정신선양중앙회원,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그리고 삼삼오오의 문인협회원 등이 제각기 작은 깃발과 손펼침막을 들고 모여들었고, 추념식을 주최한 손순원 소난지도의병항쟁기념사업회장 및 회원, 어기구 국회의원, 김홍장 당진시장을 비롯한 시청 공무원, 당진시의회, 예비군복을 입은 당진시재향군인회, 현역 군인들의 모습 등 당진시 각 단체와 소난지도 출향민이 모두 모이다시피 했는데,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석문중학교 김부영 전 교장, 신양웅 교장을 비롯한 석문중 전·현직 교직원과 졸업생들을 만난 것이었다. 이들이 소난지도(충남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 주민들과 함께 흩어져 있던 유골을 수습하여 의병무덤을 만들고 묘비를 세우는 등 소난지도 의병들의 얼과 넋을 기리는 거룩한 일을 하신 분들이 아니었던가?

필자는 약 25년 전에 답사했던 이야기와 그들의 업적을 말하니, 남몰래 했던 자신들의 일을 이방인이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던지, 그날의 일들을 다시 떠올렸다.

“바닷가에 해골이 나뒹굴고, 개들이 뼈를 물고 다니고…”

“그 해골들이 어떻게 의병의 넋인 줄 아셨습니까?”

“아, 70년대에는 현장을 목격한 분도 살아 계셨지요. 조예원 옹이라고…. 소난지도 의병전투가 그분 16살 때였으니, 생생하게 기억하셨지요.”

“당시 기록을 종합해 보면, 많게는 150여명의 의병이 순국했던 것으로 나오는데, 그 많은 의병들의 유골을 모두 수습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기록에는 그렇게 많은 의병이 숨진 것으로 나와 있지만 소난지도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의병 시신을 웅덩이를 파고 묻었고, 어민들의 그물에 걸려 발견된 시신 등이 있었는데, 실제 수습된 유골은 순국한 인원에 비해 훨씬 적었지요.”

잠시 후 수백 명 추모객은 주최 측에서 마련한 도선으로 모두 무임 승선하도록 하여 승선자의 신원만 기록하게 배려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1970년 석문중학교 신이균 이사장과 교직원이 소난지도 답사를 시작으로 마침내 1982년 의병무덤을 만들고 1987년부터 해마다 조촐한 추모행사를 해온 것이 당진시 차원의 행사로 거듭나고, 국가기념일인 제6회 의병의 날 행사가 소난지도에서 행해진다는 것에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를까!

필자는 배 위에서 소난지도 의병투쟁에 대하여 떠올리며, 과분하게도 추념사를 의뢰해 온 의병 후손들의 감회를 생각해 보았다.

▲ 2016년 6월1일 소난지도에서 열린 제6회 '의병의 날'과 '소난지도 의병항쟁 110주년 추념식'.
▲ 2016년 6월1일 소난지도에서 열린 제6회 '의병의 날'과 '소난지도 의병항쟁 110주년 추념식'.

◆ 1차 소난지도 전투는 면천성 공격에서 시작되다

1904년 2월23일, 일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대한제국 궁궐을 포위하고 일본공사와 부왜인 이지용 사이에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한 것도 부족하여, 사람들을 마구 동원하고, 땅을 임의대로 사용하는 이른바 '군율통치'를 감행하자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여 벼슬을 던지고 낙향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군부 참서관(종3품) 최구현(崔九鉉)이었다. 자는 인성(仁成), 호는 유곡(楡谷)으로 1866년 충남 면천군(현 당진시 면천면) 매염리(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에서 경주 최씨 통정대부 최영환(崔永煥)과 김해 김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난 분이었다. 1887년 무과급제 후 훈련원 봉사로 나아가 오위장, 친군총어영 기사장을 거쳐 군부 참서관으로 있었기에 군인정신이 몸에 밴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이듬해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 황제 아래 일본인 통감을 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웃 고을 청양과 홍주(홍성)에서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곡 선생은 기지시(機池市:현 당진시 송악읍 속리)에 창의도소(倡義都所)를 설치하고 창의의 뜻을 밝히는 방을 붙여 의병을 모집하니, 면천·당진·고덕·천의·여미 등지에서 모여든 의병이 370여명이었는데, 의병들은 선생을 창의영도장(倡義領導將)에 추대하였다.

드디어 5월10일(음력 4월17일) 초저녁에 면천성을 공격하여 새벽까지 관군·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무기 열세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곡 선생은 의진을 해산한 후 잔류의병 36명을 이끌고 야간에 행군에 이어 배편으로 소난지도에 도착한 날이 5월16일이었다.

유곡 선생이 면천의진을 해산했지만, 남은 100여 명의 의병들의 활동은 매우 활발하게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것이 황성신문에 보인다.

“6월 18일 의병이라 칭하는 적도(賊徒) 100여 명이 면천군에 돌입하여 군수 이교영(李喬永)을 포박하고 이속(吏屬)을 난타하고, 결전(結錢) 350냥과 양총 5정, 탄환 85발, 환도 2정을 탈취하였다.” (황성신문 1906년 6월21일 '잡보')

▲ <폭도에 관한 편책>의 당진군 소난지도 의병 관련 기록 (1908. 3. 17.).
▲ <폭도에 관한 편책>의 당진군 소난지도 의병 관련 기록 (1908. 3. 17.).

◆ 제1차 소난지도 전투

유곡 선생이 면천의병을 이끌고 소난지도에 들어가니, 이미 화성·당진 의병 40여명을 이끈 홍원식(洪元植:일명 홍일초洪一初) 의병장이 활동하고 있었기에 그들과 합류하게 되었고, 이어 5월27일(윤 4월5일)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金泰淳)이 이끈 28명이 합류했으며, 6월7일에는 홍주의병 15명을 이끈 차상길(車相吉) 등이 합류하여 소난지도에 모여든 의병은 120여명이 되었는데, 학계에서는 이들 의병을 묶어 '소난지도 의병'이라 일컫고 있다.

이들이 소난지도로 온 것은 그곳이 조선시대 조세미를 수송하던 조운선이 자주 기항하던 섬으로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기 때문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 유리한 곳이었고, 또 바닷길을 통하여 쉽게 이동할 수 있었으며, 비록 작은 섬이지만 어업을 하면서 농사도 지을 수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의병 활동에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자급자족을 생각하여 소난지도를 택했으나 막강한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장소가 좁고 고립된 지역이며, 모여든 의병들의 군사력마저 매우 미진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일본군과 전투를 지속하기 위해 간도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8월24일(음력 7월5일) 새벽 신목선(薪木船)으로 위장한 관군과 일본군 200~300명이 기습하자, 수십 명이 살상되고, 유곡 선생은 피체되어 면천감옥에 투옥되었으나 홍원식 의병장은 피신에 성공하였다.

 

◆ 홍원식 화성의진, 다시 의병투쟁에 나서다

홍 의병장은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提岩里) 출신으로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연대에 복무하던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축소될 무렵 군복을 벗고 귀향했다가 을사늑약 이후 화성과 당진지역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해 온 터였다.

홍 의병장이 이끄는 화성의진은 1차 소난지도 전투에서 악전고투를 겪고, 구사일생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의진을 수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듬해 7월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할복 자결했다는 소문과 광무황제의 퇴위에 이은 군대해산으로 민족적 분노가 다시 폭발하니, 의병에 참여하고자 하는 청년들이 의진에 적극 참여하게 되어 본격적인 의병투쟁에 나섰다.

<폭도에 관한 편책>은 1907년 8월부터 1910년 12월까지 의병학살 내용을 담은 일제의 비밀기록인데, 이를 번역한 책이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8~19권이다. 여기에 당진·면천 의병에 대한 첫 기록은 1908년 1월19일 '당진 적상(賊狀)'이란 제목으로 홍주경찰분서장 안도 토모쿠마(安藤友熊)가 내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에게 보고한 문서에 나타나고 있다.

“오늘 오전 2시경 관내 당진군에 적 약 50명이 내습하여 당진주재소 한인 순사 3명, 군수서기 1명을 나포하고 동군 북창포(北蒼浦)로 사라졌다는 당진우체소로부터 면천주재소에 급보하였다. 면천주재소 일본인 순사가 추적 중이라는 지금 오후 3시 보고에 따라 당서에서 순사 6명을 급파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8권, 436쪽)

이어 1월27일 보고에는 당진과 태안의 주재소에는 일본인 순사를 철수하고, 면천에 헌병분견소를 설치한다는 내용이다. 일제는 의병으로 인해 일본인이 위험에 처해지면, 이들을 안전지대로 철수하고, 경찰대가 의병의 위력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면, 헌병대나 군대를 주둔시켰던 경우가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금번 신배치에 의하여 관내 당진·태안의 두 주재소는 일본인 순사를 철수하였다. 원래 동반도는 남양만·천수만에 면해 수륙에 비적이 횡행하여 종전의 배치는 경찰력의 박약함을 느끼었으나 그들 비도(匪徒:의병-필자 주)에 대하여는 그래도 다소의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금회 일본인 순사의 철수와 더불어 그들은 세력을 증진하는 동시 지방인민에 대한 여러 가지 구실을 얻어 특히 그들은 처처에 별지 사본과 같은 첩지(貼紙:격문-필자 주)를 하고, 동민을 위혁(威嚇)하므로 납세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자가 많아 동 지방세무 따위는 그 중 영향을 받았다.

이에 대해 당지 헌병분견소는 때때로 헌병을 파견하여 경라(警邏) 수색에 힘썼으나 그들은 출몰이 자재하여 그 효과가 적다. 당서는 동지방에 경찰관을 증가할 필요를 인정하는 즈음에 금회 당지 헌병분견소로부터 하사 이하 10명의 헌병을 면천에 파주(派駐)시키기로 되어 오늘 부임하였으므로 향후 얼마쯤 그 정밀을 보지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9, 5~6쪽)

농민들이 나라에 세금을 내는 일은 결국 일제를 돕는 일이라고 하여 의병들은 그 세금을 내지 말고, 그것을 의진에 내라고 했기에 “납세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자가 많다”고 한 것이다. 이때는 유곡 선생이 순국한 후였기에 홍원식 의병장이 이끈 화성의진의 활약이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