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침입 '최후 방어선'에서 역사의 고비를 목격하다
/사진제공=강화전쟁박물관

 

인천 강화는 천혜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역사의 고비 때마다 국방상 요충지 역할을 했다.

갑곶돈대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왕실의 피난지인 강화를 지키는 국방유적이었다. 조선시대 숙종5년(1679)에 설치된 이후 1976년 무너진 성곽을 복원했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고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 연구, 보존, 수집하기 위해 설립된 강화전쟁박물관이 바로 이 갑곶돈대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유적지 내에는 400년이 넘은 천연기념물 제78호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가 있는데 이는 한반도 탱자나무 생육의 북쪽 한계선을 나타내준다. 이 외에도 박물관 강화와 김포사이를 흐르는 염하의 풍광을 감사할 수 있는 이섭정(利涉亭)과 조선시대 강화를 다스리던 유수(留守) 등의 선정비와 사적비 등 67기의 비석이 모인 비석군이 있어 강화전쟁박물관은 주변이 역사로 가득 찬 박물관이다.

박물관 건물은 강화역사박물관의 전신이었던 강화역사관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2010년 강화역사박물관이 건립되면서 빈 공간으로 남았고 건물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나라의 위기 때마다 호국의 관문 역할을 했던 정체성을 살려 2015년 강화전쟁박물관으로 개관했다.

▲ 병자호란 참상 담은 '한씨경란기'
▲ 병자호란 참상 담은 '한씨경란기' /사진제공=강화전쟁박물관

#상설전시관

전쟁박물관은 2층 규모로 내부 전시실은 크게 4개 부분으로 이뤄졌다.

제1전시실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의 강화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구석기시대 주먹도끼, 청동기시대 석촉, 삼국시대 환두대도 및 다양한 철촉 등 무기류를 중심으로 전시해 놓았으며, 삼국시대 한강을 중심으로 전략적 중심지였던 강화의 중요성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실 한쪽에는 역사 체험 구간이 있어 관람객들이 퀴즈 풀이와 영상 등 강화의 전쟁사에 대해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마련됐다.

제2전시실에서는 고려시대 전반을 소개하며 특히 몽골의 침입과 강화천도, 몽골에 항쟁하기 위한 성곽 축조 등이 전시됐다.

강화로 천도하면서 축조한 성곽(강화중성)의 축조기법과 성곽의 구조 등을 알기 쉽게 풀이해 두기도 했다. 주로 철제 갑옷 등 고려시대 무기를 전시하고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조선시대 호란 당시 최후의 피난처인 강화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청과 굴욕적 협약을 맺었던 연미정의 편액과 병자호란 당시 강화에 거주한 청주 한씨 형제 일가의 참상을 담은 <한씨경란기韓氏經亂記>도 주요 유물이다.

3전시실과 4전시실로 이어지는 공간에는 '어재연장군 수자기'가 있다. 수자기는 신미양요(1872년) 당시 미군이 전리품으로 빼앗겼다 장기대여 형식으로 국내로 돌아온 귀중한 자료다.

4전시실에는 한반도의 어려운 정세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온 민족 정신을 바탕으로 일제침략 시기 이동휘 장군이 이끌었던 강화진위대의 활동과 군대 해산 뒤 강화의 주요 의병 활동지를 소개하고 있다. 뇌홍식 권총, 화승총 등 근대 무기들과 한국전쟁 관련 무기류 등을 만나볼 수 있다.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양헌수 장군의 무과 합격 교지
▲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양헌수 장군의 무과 합격 교지
/사진제공=강화전쟁박물관
▲ 조선시대 외날 도검 '환도'
▲ 조선시대 외날 도검 '환도' /사진제공=강화전쟁박물관

#주요 유물

어재연 장군 수자기는 조선시대 군영의 최고지휘관이 사용했던 깃발이다. 이 수자기는 신미양요 때 강화도 수비대장이었던 순무중군 어재연 장군이 사용했다.

당시 미 해군이 전리품으로 본국으로 가져간 후 미 해사박물관에 보관해 오던 것을 2007년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 현재 강화전쟁박물관에서 전시·보관 중이다.

조선시대 17세기 자료인 '한씨경란기 韓氏經亂記' 역시 주요 유물로 꼽힌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에 거주하던 청주 한씨 형제 일가가 병가호란의 참상을 기록한 것이다.

길이 89㎝에 달하는 환도(環刀)는 조선시대 외날 도검이다. 칼집 전면에 “신축년에 강화의 창고(무기고)를 고쳐 만들며 격납했다”라는 명문기록이 있어 제작시기 등 제작과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조선 1848년에 만들어진 교지는 양헌수(1816~1888) 장군이 무과에 급제한 후 받은 합격 증서다.

양헌수 장군은 조선후기 무신으로 병인양요 때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작지만 알찬 박물관

강화전쟁박물관은 다른 박물관에 비해 소규모다. 기획전시실이 별도로 없어서 큰 전시는 기획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호국의 고장으로 강화의 전쟁과 관련된 자료를 꾸준히 축적하고 연구하는 알토란 같은 곳이다.

지난해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강화의병과 3·1운동'이라는 주제로 국권 침략, 강화진위대, 강화의병, 강화의 3·1운동 주요 장소 등을 소개하기도 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강화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기도 했다.

 


 

#김명주 학예연구사 “강화유물 원형 그대로 물려주고자 최근 보존처리실 신설”

▲ 김명주 학예연구사
▲ 김명주 학예연구사

“외세가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항상 맨 앞에 서서 맞서야 했던 곳이 바로 강화 입니다. 병인양요 때 600명의 프랑스군과 격전을 치르기도 했지요.”

강화도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5개의 진과 7개의 보, 53개의 돈대가 섬 전체를 에워싼 모양으로 설치됐다.

“강화도를 둘러싼 돈대들의 엄청난 숫자만 봐도 강화도가 군사적으로 상당한 요충지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김명주(사진) 강화군 문화관광과 소속 학예사는 약 20년간 강화군에서 박물관 운영을 맡았다. 전쟁박물관을 포함해 역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까지 세 군데를 두루 담당하고 있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국왕은 대신들을 거느리고 강화로 피난했다가 연미정에서 후금과 강화조약을 체결했죠. 정묘호란 이후 강화는 군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된 것입니다. 이런 강화의 전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김 학예사는 최근 박물관에 보존처리실을 신설하고 유물 보전에 획기적인 개선책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처음 강화의 세 박물관은 전국과 세계 여러군데 흩어진 강화 유물을 수집하고 집대성하는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유물의 원형을 유지하고 노후를 막아 후손들이 오래도록 역사를 알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공동기획 인천일보·인천광역시박물관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