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민심 타고 동학은 위세를 떨쳤다
▲ 상주 동학교당 장 <동경대전>
▲ 상주 동학교당 장 <동경대전>

개화기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의 전통적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임)를,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의 유학을 중심으로 서양문명을 받아들임)을 외쳤다면 우리는 동도서기(東道西器)였다. 즉 동도서기는 우리 고유의 제도와 사상인 도(道)를 지키되 근대 서구의 기술인 기(器)를 받아들이자는 사상이다. 이 동도서기론이 등장한 것이 1880년쯤이다. 그렇다면 수운 선생이야말로 동도서기의 발판을 닦은 이이다.

선생이 동학을 창시한데는 17세기에 들어 온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를 전제로 추론한다면 선생이 내세운 믿음 대상은 서학의 '천주'가 아닌 동학의 천주(天主:한울님)이다. '한울'은 땅과 하늘을 모두 포괄하는 우주적 개념이다. 당연히 한울이라는 개념 속에는 사람이 들어가 있다. 선생은 천주라는 신 중심 절대적인 믿음이 아닌, 사람 중심 세상인 학문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것이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이요, 만물을 다스리는 불변의 진리인 천도(天道), 한울의 뜻인 천명(天命), 한울의 이치인 천리(天理), 한울의 덕인 천덕(天德)이다. 선생이 그린 동학은 이렇게 한울과 사람이 어울렁더울렁 어울리는 세상을 그리는 학(學)이었다.

글줄을 1800년 6월28일, 정조가 승하하고 7월로 옮겨본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했으니 이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수렴청정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세도정치는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3년 후에 죽었다. 이후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집권하여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순조에 이어 헌종·철종으로 승계되는 임금은 하나같이 무능하였다.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쇠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민란이 그 서곡을 알렸다. 철종 13년(1862) 연초부터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난 데 이어 10월에는 다시 제주, 함흥, 광주에서 민심이 폭발하였다. 철종은 1863년 10월부터 최제우의 동학 탄압을 논의하고 11월 20일 정운귀를 선전관으로 임명하여 체포령을 내렸다.

이 무렵 선생의 가세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기울어져 있었다. 국내 상황은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났고 천재지변으로 흉년까지 들었으며, 국제적으로도 애로호사건(Arrow 號事件)을 계기로 중국이 영불연합군에 패배하여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는 등 민심이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선생은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한울님)의 뜻을 알아내는 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치면서 구도의 결심을 나타냈다. '제우'는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이제 선생을 체포한 정운귀(鄭雲龜)의 장계 내용을 본다. 문경새재로부터 경주까지 조정의 선전관 정운귀가 명을 받고 선생을 체포하기까지의 경과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선전관 정운귀의 서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운귀가 서울을 출발한 날은 1863년 11월20일 오시(午時) 가량이었다. 아래 정운귀의 기록을 보면 당시 동학의 위세를 가늠할 수 있다.

 

“새재를 넘은 후부터 여러 가지로 탐색하였으며 별도로 가려진 것을 찾아내려고 듣거나 본 것을 단서로 하여 말과 글자를 확인하면서 그 죄상을 밝히려 하였습니다. 새재에서 경주까지는 400여 리가 되며 고을도 십 수 주군입니다. 동학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날마다 듣지 않은 날이 없었고 경주를 둘러싼 여러 고을에서는 더욱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심하였습니다. 주막집 아낙네도 산골 초동도 주문을 외지 않는 이가 없었고 위천주(爲天主, 하늘님을 위함), 시천지(侍天地:侍天主를 잘못 쓴 것임, 하늘님을 모심)라 하며 조금도 계면쩍게 여기지도 않으며 숨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신은 감히 이 모든 사람이 그 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물든 지 오래여서 극성스러움을 가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내력을 캐고 도를 전한 스승을 물어보니 모두가 최 선생이라며 혼자 깨달아 얻었고 집은 경주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떠드는 것이 한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경주에 도착하는 날로부터 저잣거리나 절간 같은 곳에 드나들며 나무꾼이나 장사치들과 사귀어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꺼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대답도 하기 전에 상세히 전해주기도 하였습니다.”

동학의 위세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글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