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황해 섬 일대 활약에도 이름·주소는 베일 속

도서지역 의병 활동 1908년 4월 이후 기록
초기 범선 이용하다 일본인 어선 탈취하자
일본군, 8월 중순 군함·수뢰정·육전대 파견

황현 '매천야록'의 이근수와 한자명 달라
독립유공자공훈록엔 평산 출신으로 나오나
일제 '폭도수괴명부'엔 연안군 방동면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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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평도에 있던 임경업 장군 사당 충민사(忠愍祠)의 1943년 사진. 현재는 보수작업을 하였다. /사진제공=인천광역시 옹진군청 홈페이지
▲ 연평도에 있던 임경업 장군 사당 충민사(忠愍祠)의 1943년 사진. 현재는 보수작업을 하였다. /사진제공=인천광역시 옹진군청 홈페이지

 

◆ 연평도 역사

연평도(延坪島)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을 구성하는 섬으로 북방한계선에 매우 가깝다. 인천시청에서 북서쪽으로 약 83.2㎞(뱃길 145㎞) 지점에 대연평도가 있고, 대연평도에서 남쪽으로 약 4.5㎞ 지점에 소연평도가 있다.

연평도는 <고려사절요> 제6권 선종 10년(1093) 조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관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황해도 해주 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도 해주목에 속한 섬으로 나와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나라에서 군마(軍馬)를 기르는 목장이 있었음이 <조선왕조실록>에 드러나 있다.

연평도 연해는 예로부터 조기가 많이 잡혀 파시(波市)로 유명했는데, 최근에는 연평해전으로 인해 널리 알려진 섬이다. 그런데, 연평도 홈페이지에는 '충민사(忠愍祠)' 사진과 함께 그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조선중기의 명장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고 청나라를 치기 위해 명나라로 가던 중 연평도에 들러 식수와 부식을 구하기 위해 가시나무를 무수히 꺾어다가 지금의 당섬(堂島) 남쪽 '안목'에 꽂아놓고 간조 때 이름 모를 물고기를 무수히 포획하였다.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이며, 그의 전설적인 지혜를 숭모하고, 임경업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사당 충민사를 지어 해마다 봄에 전주민이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풍어제)를 지내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정권이 친명배금 정책을 지향하자 1627년 1월 후금(청국 전신) 3만여 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공하고 3월에 강화를 한 것이 정묘호란이었다. 조선이 여전히 친명 색채를 이어가자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꾼 홍 타이지(청 태종)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때 청군은 임경업 장군이 지키고 있던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쳐들어와서 마침내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의 항복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청군은 서해의 가도(椵島)에 있는 명군을 치기 위해 조선군의 동원을 강요해 임경업 장군이 조정의 지시에 따라 출전하게 되었을 때 청군은 육로로, 조선군은 바다로 가기로 했는데, 매우 천천히 전장에 도착한 임경업 장군은 명군과 내통하여 싸우는 척만 하였다.

청국에서는 친명배청 사상의 핵심에 임경업 장군이 있다고 여겨 감언이설로 임경업 장군을 청국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관리(칙사)를 보내서 그를 문초하려 했다. 이에 임경업 장군은 머리를 깎고 승려생활을 하다가 명나라가 망하기 전해인 1643년 5월, 비밀리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명나라로 향하였다.

임경업 장군은 명나라가 망하자 청국 관리에게 피체되어 조선으로 보내져 국문을 당할 때의 모습이 실록에 실려 있다.

 

“경강(京江:한강-필자 주)에 이르러 배 한 척을 빌려 계미년(1643) 5월 26일에 마포에서 출발하여 해서(海西)를 통해 바다로 들어갔는데, 칼을 빼들고 뱃사람들을 협박하기를 '내가 바로 임 병사(林兵使)이다. 중원으로 가려 하는데 너희가 만일 따르지 않으면 이 칼로 결단을 내겠다.' 하였더니, 모두가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에 녹도(鹿島)로 갔다가 이 해 가을에 해풍도(海豊島)로 옮겼으며 명나라 장수 진영에 구금되었다가 마침내는 중국 장수 황비(黃飛)・송길(宋吉)과 함께 군사를 내어 의주를 막아 끊을 방법을 모색하면서 대군(大君)을 우리나라로 귀환시킬 계책을 세우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 6월 17일)

 

여기서 말하는 '녹도(鹿島)'는 오늘날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있는 섬인데, 조선시대는 해서지방 어느 섬의 이름인지 알 수 없으나 '해풍도(海豊島)'는 중국 산둥반도 제남부(濟南府)에 있는 섬이다.

임경업 장군이 1643년 명나라로 향할 때 연평도에 들렀는지, 청국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명군을 치기 위해 임경업 장군이 수로를 통하여 전장으로 가면서 연평도에 들렀을 때의 일화였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 융희 2년(1908) 4, 5월부터 7, 8월 동안 황해도 해안과 경기도 도서지역 의병활동상이 드러난 일제의 기록.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59쪽)
▲ 융희 2년(1908) 4, 5월부터 7, 8월 동안 황해도 해안과 경기도 도서지역 의병활동상이 드러난 일제의 기록.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59쪽)
▲ 일본 군함 치하야(千早)와 수뢰정 하이다카( ) 등을 동원하여 7척의 어선에 분승한 의병을 말도(唜島·현 인천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부근에서 추격한 기록.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권. 508쪽)
▲ 일본 군함 치하야(千早)와 수뢰정 하이다카( ) 등을 동원하여 7척의 어선에 분승한 의병을 말도(唜島·현 인천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부근에서 추격한 기록.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권. 508쪽)
▲ 이근수 의진이 이진룡 의진 등과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벌인 기록.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0. 14.)
▲ 이근수 의진이 이진룡 의진 등과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벌인 기록. (<폭도에 관한 편책>. 1908. 10. 14.)

 

◆ 경기・·황해도 섬 지역 의병활동

일제침략기 의병은 전기의병(1894~1896) 때는 주로 대도시 지역에서 활약했고, 후기의병(1904~1910) 때는 산야와 도서지방에서도 활동하였다.

경기·황해도 섬 지역의 의병투쟁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4월 이후인데, 당시에는 일제에 피체된 의병이 없어서 의병장이나 의진의 규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의병들이 처음에는 한두 척의 범선(帆船:돛단배)을 이용하다가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심지어 일본인 어선이나 어선 지도선을 빼앗아 활동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자 일본군사령부는 러일전쟁 때 사용했던 군함과 다수의 수뢰정을 동원하고, 현재 우리나라 해병대에 해당하는 육전대(陸戰隊)를 파견하여 의병 진압에 나서게 된 것은 그 해 8월 중순부터였음을 '일본 군함·수뢰정과 맞선 강화의병장 김용기' 편에 기술한 바 있다.

그리고 경기·황해도 해안지방에서 의병투쟁을 벌인 심노술(沈魯述)·지홍윤(池洪允) 의진에 대하여 연재한 바 있는데, 이때 이근수(李根守) 의진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융희 2년 4,5월부터 7,8월에 걸쳐 황해도 평산군·배천군·연안군 및 강화 17면, 신도·시도·장봉도·주문도·아비도·망도·말도 등의 각지에 전전 횡행 약탈을 자행하고, 동년 9월 자칭 의병대장 김봉기(金鳳基:김용기金龍基의 이명-필자 주)와 서로 호응, 기맥을 통하고, 동(同) 돌격진(突擊陣) 부장(副將) 지홍일이라 자칭하고, 10월 중 강화군 간점면(艮岾面)에서 강화분견소 헌병 및 보조원의 한 부대와 접전, 3시간여에 이른 일이 있다. 그달 해주로부터 강화도에 와서 외가면(外可面) 삼거동(三巨洞)에서 일본인 고려자기 도굴범 6명을 살해한 사실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59쪽)

 

융희 2년(1908) 4, 5월부터 7, 8월에 걸쳐 황해도 평산군·배천군·연안군 및 강화군 17면, 신도·시도·장봉도·주문도·아비도·망도·말도 등지에서 김용기·지홍윤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이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심노술 의병장은 박정빈(朴正斌) 의진의 중대장으로서 황해도 지역에서, 김용기 의진의 부장(副將)으로 강화도에서도 의병투쟁을 펼쳤는데, 그 해 11월 초순 김용기 의병장이 무기구입을 위해 서울에 잠입했다가 피체되자 심노술 의병장이 독자적인 의진을 형성하여 크게 활동하였다. 그는 강화도 출신 지홍윤 의진은 물론, 박정빈 의진의 대대장 이진룡(李鎭龍) 휘하의 여러 의진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이 황해도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폭도 정찰 상황의 건'(1909. 1.18.)에 나타나 있다.

 

“해주 동부, 특히 연안·배천 방면에 있어서의 폭도 출몰 상황은 지난번 누차 보고한 바, 그 후 해주경찰서에서 그 방면에 있어서의 폭도 상황을 정찰한 결과, 최근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적도(賊徒:의병-필자 주)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및 총 인원수

주괴(主魁:중심 의병장-필자 주) 심노술인 바, 그 부하의 “지중대(池中隊)”이라 칭하는 지홍일(池洪一)(강화도로부터 도피하여 온 자)이란 자가 150여 명을 모아 그 지휘 아래에 삼삼오오 각 방면을 출몰하고 있었다. 기타 이근수(李根守)·지석남(池石南) 2명이 이끄는 각 수십 명의 집단이 있다. (후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162쪽)

 

이 보고서에서 황해도 해안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심노술 의병장을 “주괴(主魁)”로 칭할 만큼 그 영향력은 컸고, 지홍윤 의병장이 그의 의진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한 것과 이근수(李根守)·지석남(池石南) 의병장이 각 수십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있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1908년 봄부터 여름까지 황해도 해안과 경기도 도서지방에는 김용기·심노술·이근수·지홍윤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의 활약이 매우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 신비의 인물 이근수 의병장

“평산의병장 이근수(李根秀)가 해주 연평도에서 전사했으며, 부하 50여 명도 모두 전사했다. 일병 전사자도 또한 20여 명이었다. 이근수는 정미년(1907)에 의병을 일으키면서부터 평산과 해주 사이를 왕래하며 정병 5백여 명이 있었으며, 일병과 30여 회 싸워 일찍이 패하지 않았으나 연말에 병대(兵隊) 해체하고 단지 60여 명을 인솔하고 연평도에 들어가 해를 보내고자 했다. 일병은 그를 감시하면서 상황을 파악한 후 먼저 들어가 매복하고 있었다. 결국 이근수는 그들의 꾀에 빠져 힘써 싸우다가 전사했다.” (황현 저/김준 역, <매천야록> 제6권. 825~826쪽)

 

이근수 의병장은 한자 이름부터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매천야록>에는 '李根秀'로 기록했고,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권에도 '이근수(李根秀, 미상~1909)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으로 1907년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약한 이진룡(李鎭龍) 의진에 소속되어 부장(部將)으로 활약하였고, 이명은 없다.'고 기록하였다.

을사늑약 직전 장례원경을 지낸 종1품 李根秀와 동일인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일제의 의병학살 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32차례 모두 '李根守'로 나와 있다.

게다가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본적·주소를 모두 황해도 평산이라고 했으나 일본군 북부관구사령부에서 작성한 이른바 '폭도수괴명부(暴徒首魁名簿)'에는 그가 황해도 연안군 방동면(方東面) 출신으로 나와 있다.

이근수 의병장이 연평도에서 전사한 후 일제에 의해 그곳에 매장됐다가 훗날 그의 형이 '연안군 거래포 현암동(玄岩洞)에 개장(改葬)'한 기록으로 보아 그의 고향은 황해도 연안이 아닐까 하고 추정해 본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