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평화를 향한 대의, 밀정의 간계에 꺾이다

1908년 2월 임진강 유역으로 의진 옮겨
기존 지역 의병 모아 창의원수부 조직

일본군 유인 섬멸 작전 펼치는 맹활약에
일제, 병력 급파·포천지역 경비전화 가설
12월부터 3개월간 경기북부서 수차례 교전

탄약 부족·병력 손실로 1909년 3월 해산
박노천·신좌균 유인책에 용산서 31일 피체
5월8일 교수형 선고받고 6월16일 순국
▲ 이은찬 의병장 묘(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창의원수부 의진 활동상을 기록한 일제의 <폭도에 관한 편책>을 번역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권. 262~263쪽.
▲ 창의원수부 의진 활동상을 기록한 일제의 <폭도에 관한 편책>을 번역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권. 262~263쪽.

 

▲ 창의원수부 활약상이 드러난 문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505쪽)
▲ 창의원수부 활약상이 드러난 문서.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505쪽)

◆ 창의원수부 중군으로 경기 북부지역에서 활약하다

13도창의대진소 원수부(元帥府) 중군이었던 이은찬 의병장은 이인영 대장이 문경으로 향한 후 의진을 임진강 유역으로 옮긴 것은 1908년 2월이었다. 그는 허위(許蔿), 김수민(金秀敏), 조인환(曺仁煥), 왕회종(王會鍾), 김진묵(金溱默), 박종한(朴宗漢)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진과 연계하여 경기 북부지역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종전의 13도창의대진소 원수부를 수습하고,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하던 의병을 모아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라는 의진을 조직하여 선봉장 김귀손(金貴孫, 본명 金潤宗), 우군장 윤인순(尹仁淳), 좌군장 정용대(鄭容大), 자신은 중군을 맡았다. 4명의 의병장은 의진을 나눠 크고 작은 의병투쟁을 펼쳤는데, 대규모 일본군경과 전투를 벌일 때는 연합하였다.

한편, 1907년 10월부터 허위 의진에 참여하여 13도창의진 진동(경기도·황해도) 창의대장이 되었다가 뒤에 이인영 직할부대였던 원수부 대장으로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했던 권중설(權重卨) 의병장은 1908년 6월 허위 의병장이 피체된 후 의진을 수습하여 창의군수부(倡義軍帥府)를 조직하여 대장으로서 경기도 양주·포천·영평·연천·장단·마전, 강원도 춘천·철원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다.

창의원수부 의진은 창의군수부 의진과 의각지세(犄角之勢)로 의병투쟁을 벌이면서 의복, 식량, 무기 등의 확보를 위해 포천, 영평 일대에서 군자금과 군량을 모을 때에도 이은찬 의병장은 반드시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후일 갚도록 함으로써 민심 확보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마쓰이(松井茂) 내부 경무국장이 통감과 주차일본군 사령관 등에게 보고한 문서에는 그가 주민들로부터 얼마나 존경받았는지 그 면모가 드러나 있다.

“은찬은 유생으로 천성이 영리하고 재기가 있다. 국가를 위한 지사적 사상을 갖고 항상 정의를 표방하여 민심을 수렴하였다.

(중략)

군량미의 징발과 같은 것도 직접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강제로 빼앗는 것은 피하고, 각 면장 등에게 통고하여 일반인에게 징집시켰으며, 또 음식물 기타 구입 물품의 대금도 지불을 게을리하지 않고, 혹은 유사의 증표로써 대신하고 후일 그 대금을 지불했으며, 되도록 인민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부하 의병들은 물론 지방민들도 그 덕에 감사하고 이(李)를 '대장(大將)' 또는 '각하(閣下)'라고 일컬었다. 순진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기쁘게 영접하고, 그의 행동을 비밀로 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보초가 되어 그 주위를 경계하기도 하고, 혹은 밀정이 되어 관헌의 행동을 통고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권. 262~264쪽)

이은찬 의병장이 이끈 연합의진에서 김귀손·윤인순·정용대 의진의 의병투쟁은 맹위를 떨쳐 일본군 수비대, 헌병대, 경찰대를 섬멸하기 위한 유인책을 쓸 정도로 능동적인 활약을 벌여 일본 군경을 무찔렀다. 이에 일본군은 용산수비대와 경성헌병대의 병력을 급파하고, 포천지역에 경비전화를 가설하는 등 이은찬 의진의 습격에 신속히 대처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진의 선봉장 김귀손 의병장이 11월23일 파주에서 피체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9년 1월4일 이은찬 의병장은 200여 명의 의진을 이끌고 포천지역의 전봇대를 쓰러뜨려 전화선을 절단한 후 포천헌병분견소와 수비대를 기습하고, 양주로 이동하였다. 1월7일에도 양주헌병분견소를 기습하면서 다른 의진으로 하여금 동두천헌병분견소를 공격하게 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1월15일 밤 300여명의 의병으로 포천군 내촌면 내리와 가산면을 기습하고 양주로 나아가서 김봉수(金鳳洙) 의병장과 그동안 소모된 군자금 및 군량미를 보충하면서 10일간의 전투준비를 하였다. 1월25일에는 170여명의 의진을 지휘하여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본군 정찰대 및 경찰대와 교전함으로써 전투를 재개하였다. 그리고 1월26일, 28일에도 의진을 두 부대로 나누어 연천군 적성면과 양주군 광적면에서 다시 일본 헌병대와 경찰대를 공격하였다.

이처럼 경기 북부 연합의병은 1908년 12월부터 약 3개월간 포천, 가평, 양주 등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줄기찬 의병투쟁을 벌여 큰 성과를 거뒀으나 1909년 2월 상순에 이르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연일 계속된 전투로 탄약이 결핍되고, 사상자가 속출하여 전투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3월 2일 오전 6시 30분, 당서 및 양주헌병의 연합대는 양주군 회암면 귀율리(貴栗里)에서 적괴(의병장-필자 주) 이은찬 및 정용대가 인솔하는 약 80명의 폭도(의병-필자 주)를 공격하였다. 교전한 지 30분 만에 폭도는 사자 1명, 부상자 약 10명을 출하고 포천군 송우(松隅)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군도 1자루, 회중시계 1개, 잡품 몇 점을 노획하였다.”

“3월 4일 오후 1시, 양주군 의정부 헌병은 포천군 외소면 무림리(茂林里)(당서로부터 동방 약 30리)에서 이은찬·정용대가 인솔하는 약 100명의 폭도를 공격하였다. 적은 약 30분 후 부상자 1명을 출하고 동방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505~506쪽)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였던 일본군은 군경 합동부대를 편성하여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은찬 의진은 전투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포천과 양주 등지로 옮겨 다니며 이들의 수색작전을 피했으나 3월6일 양주군 현암리에서 이들의 공격을 받았고, 이어 3월17일 양주 북방 4리에서 의진의 우군장 윤인순 의병장이 일본군 삭령수비대와 전투 중에 부하 2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자 그는 의진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경기도 북부지역에서 활약하던 창의군수부 권중설 대장은 창의원수부 좌군장 정용대 의병장과 함께 의병투쟁을 벌이면서 경성의 각국 영사에게 통고문을 발송하기도 했는데, 1910년 3월13일 적성헌병분견소 헌병들에 의해 고재식(高在植)과 함께 피체되었다.

 

◆ 밀정의 간계에 피체, 경성감옥에서 순국하다

의진을 해산한 이은찬 의병장은 이인영 대장께 이를 고하고, 장차 재기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밀정 박노천, 신좌균 등은 과거 동지였던 조수연을 보내 군자금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경성으로 유인하였는데, 이들의 간계에 속아 3월31일 용산 정차장으로 나갔다가 그곳에 잠복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용산경찰서원은 3월 31일(1909년-필자 주) 용산 정차장에서 재작년 말 경기도 포천·양주·영평·가평군 지방을 횡행하던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이은찬 및 적 3명을 체포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권. 221쪽)

“경기도 북부의 폭도(의병-필자 주)는 지난해 3월 이래 점차 그 수를 증가하여 적으면 2, 30명, 많으면 2, 3백 명의 집단을 이루어 각처에 출몰, 횡행하여 재화를 약탈하고 양민을 납거하고 포악한 행위를 자행하였다. 그중 양주·적성·영평·포천의 각 군내는 출몰이 가장 빈번한 지점으로 그 수괴 이은찬은 재작년 7월 원주에서 폭도를 규합하고, 허위(許蔿)·이강년(李康秊) 등과 통하여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를 전전하였다.

지난해 3월 경기도에 들어와 다시 적괴 윤인순(尹仁順)·정용대(鄭容大)·연기우(延基宇) 등과 합하여 스스로 '수부선봉(守府先鋒)'이라 칭하고 그 수장(首將)이 되어 부장(副將)·참모·전령 등의 직책을 두고 부대를 나누어 대오를 조직하며 다수어(多數御)하는 범절(凡節)에 합하여 그 부하가 가장 많을 때는 2천5백 명에 달한다고 양언(揚言)하고, (중략)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적괴 이은찬도 드디어 의지할 곳이 없기에 이르게 됨으로써 다시 경상도에 들어가서 재거(再擧)를 계획하고자 하여 길을 경성으로 취하고, 통과 도중에 용산 정차장에서 용산경찰서의 손에 체포되어 오랜 폭도의 횡행 구역이었던 양주 지방은 이제 전연 평온으로 돌아가서 질서가 점차 회복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62~264쪽)

이은찬 의병장은 재판정에서 '거의하여 40여 차례 의병투쟁을 벌여 일본 군경 470여 명을 죽였고, 거의한 것은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한 것'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내가 너희들과 싸우기를 대소 40여 차례 하였으며, 너희 병정 470여 명을 참살하였으니 빨리 죽여라. 나의 거의는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함이니, 오늘에 이르러 어찌 자신의 영욕을 생각하랴?”

1909년 5월8일 이은찬 의병장은 일제가 사법권을 쥐고 있던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죽음을 앞둔 그는,

 

'일지리수작위선(一枝李樹作爲船) 자두나무 가지 하나로 배를 만들어

욕제창생박해변(欲濟蒼生泊海邊) 창생을 건지고자 해변에 띄웠는데

촌공미취신선익(寸功未就身先溺) 작은 공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빠졌으니

수산동양락만년(誰算東洋樂萬年) 누가 동양의 만년 평화를 기약하리오!'

 

라는, 옥중시를 남기고 6월16일 경성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1999년 6월)로 선정하였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