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한의학·의료생활이 궁금하다면…

 

길병원 세운 의사 이길여, 고서 공유하려 박물관 설립

의서만 900여점 보유
한국 최대 의학사료관

인천 박물관 유일 국보 소장
국가지정문화재 15점 보관

이희경 선생 4236권 기증 계기
창간호 국내 최다 수집
기네스북 올라 둘러보는 재미

 

푸르르고 고즈넉한 인천 연수구 청량산 자락에 가천박물관이 우뚝 서 있다. 가천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이 박물관엔 국내 최다, 최대,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산부인과 의사로 시작해 가천대 길병원을 설립한 이길여 박사가 가천박물관을 세운 만큼, 이곳은 한국 최대 의학사료관으로 손꼽힌다. 인천 지역에서 유일하게 국보를 보유한 박물관이기도 하며 한국에서 가장 많은 창간호를 소장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길병원 아껴준 시민들에게 문화·예술로 보답

가천박물관이 설립되기까지의 사연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쯤 고서점을 운영하던 사람이 이길여 박사를 찾아와 고서 관리를 부탁했다. 전통문화 유산 보존 차원에서 거금을 들여 지원한 이 박사는 자료를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1995년 가천문화재단과 박물관을 설립했다.

병원 한 켠에서 시작한 박물관은 2005년 연수구 옥련동 신축건물을 지어 이전해 지금의 가천박물관 형태를 갖췄다.

현재 가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서는 7000여점이며 그 중 의서가 900여점이다. 이 외에도 유교 관련 서적, 문집류, 고문서 등을 보유하고 있다. 이후 박물관은 의료사와 관련된 유물을 수집했다.

보물 제1178호 '향약제생집성방 권6'을 비롯한 8점의 의학 관련 보물 지정문화재 등 국내 박물관 중 가장 많은 의학 관련 국가지정문화재가 있다. 이 보물 지정 의서들은 국내 유일본인 희귀한 서적들이며 조선시대 한의학과 의료생활사를 규명하는데 있어 귀중한 연구 자료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의료생활사를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로 유입된 서양의학의 모습과 현대 의학의 발전을 말해주는 의료기구와 자료들도 볼 수 있다.

 

 

#인천에서 유일하게 국보를 가진 곳

▲ 가천박물관이 보유한 국가지정문화재는 2층 국보보물관에 전시돼 있다.
▲ 가천박물관이 보유한 국가지정문화재는 2층 국보보물관에 전시돼 있다.
▲ 국보 제276호 '초조본유가사지론' 권53.
▲ 국보 제276호 '초조본유가사지론' 권53.

 

 

이길여 박사가 70년대 기증받은 고서 중 감정평가 결과 문화·역사적 가치를 갖춘 것들이 나왔다. 이 가운데 '초조본유가사지론'은 국보로 인정됐다.

국보 제276호 초조본유가사지론 권제53(初雕本瑜伽師地論 卷第五十三)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중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의 53권째 해당하는 책이다.

초조대장경의 경판은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군이 개경을 침범하자 부처님의 가호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새기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판각인쇄술을 선보인 초조대장경은 조판된 이후 대구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다가 몽골군의 침입으로 경판이 모두 불타버리고 지금은 불과 2700여권의 인쇄본만 국내와 일본에 전한다.

유가사지론이란 유식불교(唯識佛敎)의 실천 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음의 문제를 다룬 글이다. 인도의 미륵이 짓고 당나라의 현장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초조본유가사지론은 2011년 각필로 새겨진 석독구결이 발견돼 다시 한 번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석독구결은 경전 등을 우리말로 새겨 읽기 위해 원문에 나무, 뿔, 상아 등을 뾰족하게 다듬어 종이에 눌린 자국을 내는 방법으로 표시한 것이다. 이는 초조본유가사지론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서 국보로써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가천박물관에 있는 국보 1점, 보물 14점, 유형문화재 3점 등 국가지정문화재는 인천 소재 국가지정문화재의 50% 이상에 해당한다. 가천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15점의 국가지정문화재는 전국 박물관 1000개 가운데에 10위권에 해당한다.

2011년 '중수정화경사증류비용본초 권17'이 새롭게 보물 1716호로 지정받았으며, 2012년에는 '신간소문입식운기론오', '효경', '증주당현절구삼체시법' 등 3점의 고서가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모든 창간호가 모여있는 가천박물관

▲ 근대 잡지 '소년' 창간호.
▲ 근대 잡지 '소년' 창간호.
▲ 가천박물관 2층에는 다양한 정기간행물의 창간호가 보관돼 있다.
▲ 가천박물관 2층에는 다양한 정기간행물의 창간호가 보관돼 있다.

 

 

가천박물관은 신문·잡지 등 정기간행물의 가장 첫 번째 호인 창간호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1996년 이희경 선생이 4236권의 창간호를 박물관에 기증한 계기로 본격적으로 수집을 시작했다. 지금은 국내 최다 창간호를 보유한 것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돼 있다.

1906년에 창간된 '대한자강회월보'를 비롯해 1907년에 발행된 '낙동친목회학보', 1908년 근대잡지의 효시라 불리는 '소년', 1927년 한글학회에서 발행한 국문 연구 학술지 '한글' 등 한국 잡지 탄생기에 발행된 희귀 창간호도 모두 관람 가능하다.

가천박물관은 창간호실을 운영하며 전시를 통해 한국 잡지의 발전사를 조명하고 있다.

 

#윤성태 가천박물관 관장 “과거의학에도 배울 점 많아”

▲ 윤성태 가천박물관 관장
▲ 윤성태 가천박물관 관장
▲ 보물 제1249호 '간이벽온방'.
▲ 보물 제1249호 '간이벽온방'.

 

“40년 전이었어요. 대통령비서실에 있을 때 의료취약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서 산간지역에 병원을 세워 줄 재벌그룹들을 물색했죠. 선뜻 나서는 기업이 없었는데 가녀린 여성 한 분이 찾아온 거에요, 자기가 한 번 해보겠노라고… 바로 이길여 의사였어요.”

윤성태 가천문화재단 이사장이자 가천박물관 관장과 이길여 박사의 인연은 이때 시작됐다.

인천에서 작은 병원을 운영하던 이길여 박사는 양평 산골짜기에 길병원을 설립하고 의료 수혜를 받지 못해 어려움에 처해있던 주민들을 도왔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재벌들도 마다하던 일에 봉사 정신 하나로 뛰어드는 걸 보면서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죠.”

이후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과 의료보험연합회 회장, 국제사회보장협회 집행위원 등을 지낸 윤 관장은 가천문화재단을 맡아달라는 이길여 박사의 청에 응했다.

“인천을 사랑하는 의료인이자 어른의 입장에서 박물관을 설립한 마음을 알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가천박물관은 최고의 의사를 꿈꾸는 의대생들과 고등학생들의 교육현장이 되고 있죠. 자부심을 느낍니다.”

특히 가천박물관의 유물 중 '간이벽온방'은 1524년 평안도 전역에 발병한 '여역'이라는 전염병에 대해 기술한 책이다. 여기서 역병의 원인과 치료, 예방법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의 코로나19 상황과 매우 닮아 있다.

“현대 의학이 과거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그 역할을 우리 박물관이 하려 합니다.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거죠.”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사진제공=가천박물관

/공동기획 인천일보·인천광역시박물관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