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도화선 '러일전쟁'…우리 민족의 아픔

 

 

 

 

 

 

일본함대, 제물포항·뤼순항서 러시아함 기습공격…1904년 발발

1905년 대마도해전까지 승리…미국 중재로 '포츠머스조약' 체결

한국서 우월 위치…1905년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을사늑약' 맺어
 

 

 

황해바다와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한 지 꼭 10년 만인 1904년 2월 9일, 대한제국의 관문항인 제물포항과 만주의 관문항인 뤼순항에서 일본함대가 러시아 함을 기습공격하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선전포고도 없이 일본이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러일전쟁 혹은 일로전쟁(日露戰爭)이라 불리는 이 전쟁에 대하여 혹자들은 '제0차 세계대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 뒤에는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의 뒤에는 독일과 프랑스가 후원했던 이 전쟁은 20세기의 서장을 연 사건이자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10년 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거액의 배상금과 함께 랴오둥반도, 타이완 등을 조차하고 나서 조선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1895)을 일으켜 랴오둥반도를 반환케 하고 러시아가 오히려 뤼순과 다롄을 조차하면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의 상당 부분을 빼앗았다.

1900년대 들어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각축하였는데, 제물포 개항장에서는 이미 치열하게 각축하고 있었다. 제물포 개항장 정박지에 위치한 월미도에는 좋은 장소에 저탄창고를 마련하기 위해 1896년부터 경합했다. 러시아는 또 1902년 10월 31일에는 제물포 개항장에 뒤늦게나마 영사관까지 개설했다.

러일전쟁의 발발은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함대가 뤼순에 정박해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한 시점에서 개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소비에트시대에 출간된 러시아의 공식전사에는 뤼순의 공격이 전개된 1904년 2월 9일 밤보다 몇 시간 전인 2월 9일 오후 4시 제물포에서 첫 교전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물포에서 이루어진 이 전투를 제물포해전, 일본에서는 인천충해전(仁川沖海戰)이라고 부른다.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항에서 일본조계를 경비해주던 치요다 호가 항내에서 사라지자 일본조계의 일본인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나 치요다 호는 곧 20여 척이 넘는 일본 함대를 이끌고 제물포항에 입항했다.

일본 함대는 외항에 정박하는 한편, 수송선을 제물포에 보내어 1904년 2월 8일 오후 5시 30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일본육관 제12사단 제23여단인 기고에 여단 3000명을 제물포에 상륙시켰다.

청일전쟁에 이어 일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무단 감행된 것이다. 일본해군 제4전대 사령관인 우리우 사령관은 중립항인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에게 9일 정오까지 항구 밖으로 떠날 것을 통첩했으며, 만약 이에 불응하면 항구 내에서 공격을 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바랴그(Variyag) 호와 코레예츠(Koreietz) 호는 닻을 올리고 11시 20분 끝까지 결사항전하기 위해 팔미도 해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팔미도 해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치요다 호를 비롯한 일본 함정 10여 척과 대치하게 되자 전투를 벌였다.

접전 40분 만에 러시아 순양함 바랴그 호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함포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두 척의 전함이 자폭함으로써 전투는 종료되었다. 2월 7일 입항하여 제물포항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동청철도 소속의 상선 숭가리(Sungari) 호 역시 전함들의 뒤를 이어 자폭하면서 러일전쟁의 서막은 열렸다.

일본 메이지 천황은 1904년 2월 10일 동양의 평화와 각국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대러시아 선전포고 칙어를 발표한다.

뤼순 봉쇄에 성공한 도고(東鄕) 함대는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였고,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진한 제1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였다.

일본군은 1905년 3월 봉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육상전을 사실상 승리로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봉천전투 이후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전비를 마련하기가 어려워 서둘러 종전해야 할 입장이었다.

1905년 국내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러시아 역시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일본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오느라 전력과 전의가 극도로 떨어진 발틱함대와 1905년 5월 27일 대마도해전(對馬島海戰)을 벌여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후 일본은 미국에 중재를 요청해 9월 5일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한국에서의 가장 우월한(paramount) 이익을 보유하고 요동반도 조차권을 비롯한 만주에서의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에 이르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제물포의 영웅들'과 '인천의 날']


러시아 수병들 생생 인터뷰 '오페라 유령' 작가 책 으로



러, 국내 시민사회 반대 속 해전 100주년 추모비 건립

 

▲ 제물포의영웅들 한국어 번역본(2007)
▲ 제물포의영웅들 한국어 번역본(2007)

 

▲ 러시아전몰수병추모비(2004)
▲ 러시아전몰수병추모비(2004)

1904년 프랑스 파리에서 '제물포의 영웅들'(원제 LES HEROS DE CHEMULPO)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러일전쟁의 실질적 개전을 알렸던 제물포해전의 전 과정을 생생한 묘사한 책으로 저자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환상문학가 가스통 르루(Gaston Leorux)이다. '제물포의 영웅들'은 그가 <르 마탱>의 특파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1904년에 출판한 르포르타주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가 한국의 제물포에 직접 와서 취재한 것이 아니라, 제물포해전 후 귀국 길에 오른 러시아 수병들을 유럽에서 만나서 5일간 함께 여행하면서 인터뷰한 내용을 중심으로 완성한 것이다.

'제물포의 영웅들'은 러시아 병사들의 증언을 통해 제물포해전의 실시간의 상황을 전달해준다. 아울러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의 입장에서 일본의 기만적인 기습공격에 맞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전하면서 배를 전리품으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폭했던 러시아 수병들의 영웅적인 면모를 소설가다운 필치와 삽화로 보여주었다.

제물포해전이 발발한 지 꼭 1년만인 1905년 2월 6일, 인천의 일본인 거류민회에서는 제물포해전에서 승리한 2월 9일을 '인천데이'로 제정하는 의안을 제출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후 해마다 2월 9일을 '인천데이'로 제정하여 2월 8, 9일간 기념행사를 거행하였다.

2004년 2월 8일은 제물포해전이 발발한 지 꼭 100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러시아에서는 수년 전부터 월미도에 바랴그 호와 카레예츠 호의 전사자 추모비 건립을 타진해왔다.

그러나 인천 지역 시민문화단체들은 한반도 침략을 두고 각축했던 일본과 러시아의 제국주의 전쟁을 기념하는 시설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했다.

결국 러시아는 월미도에 추모비를 세우지 못하고 2004년 2월 10일 연안부두 친수공간에 추모비를 세우고 기념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인천의 11개 시민·문화단체들은 2월 6일 추모비 건립을 반대하는 시위를 기념식장 주변에서 전개한 바 있다.

제물포해전은 일본에게는 일본 국가주의의 전승 상징으로, 러시아에게는 러시아 민족주의의 영웅들로 표상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러일전쟁은 무엇인가. 그저 잊어야만 하는 전쟁일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