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년학회장·한서대 교수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들어 죽음에 이르는 것 만큼 자연스러운 이치가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살아간다. 할 수 있는 한 오래 젊음의 끈을 붙들고 갖가지 위장도구들을 총동원해서라도 젊음의 가면을 쓰고 나이를 속이며 살고 싶어한다. 마치 늙음을 들키면 큰일이라도 날듯이 우리 사회에서 노화는 금기의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의학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오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다. 자연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우리 앞에 늙음이라는 것을 기어코 가져다 놓고야 만다.

 

시장에는 화장품부터 미용기구, 의약품, 각종 시술까지 안티에이징(anti-aging) 제품과 서비스들로 넘쳐난다. 피부 아래에 다양한 이물질을 주입하거나 이리저리 피부 가죽을 당기고 늘어진 피부를 잘라내서라도 더 젊게, 조금 더 젊게 보이기를 열망한다. 자연스런 노화의 섭리에 반항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동안(童顔)공화국, 성형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다. 언젠가 한 잡지에서 보았던 '쭈글쭈글 여배우 어디 갔어?'라는 제목의 글이 생각난다. 노년의 문턱을 넘어선 여배우는 팽팽한 얼굴의 옛 모습을 그대로 한 채 시청자들을 속이고 있다. 젊음 만능주의에 빠져 TV 드라마 속에는 외모로는 도저히 구분이 안 가는 자매 같은 모녀 혹은 고부, 아가씨 같은 아줌마, 아줌마 같은 할머니들이 자주 등장한다.

2017년 이탈리아의 한 타이어 회사에서 내놓은 캘린더에는 케이트 윈슬렛, 니콜 키드먼, 우마 서먼, 줄리언 무어, 페넬로페 크루즈, 장쯔이 등 세계 유명 여배우들을 모델로 한 40장의 사진이 실렸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 모두가 화장끼 없는 맨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을 뿐 아니라, 후보정(後補正) 작업도 없었다는 점이다. 더 젊고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하는 세상에서, 있는 세월의 흔적과 나이를 그대로 드러낸 사진은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더 큰 감동을 선사했다.

노화에 대한 거부는 비단 외모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늙음을 부정하고 젊음을 고수하면서 사회적 권력을 지키고 되찾기 위한 노화에 대한 반항과 반란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다. 스스로를 노인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노인들의 나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중년과 노년의 중간 어디쯤에 제3지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2017년 노인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인들 스스로 인식하는 노인의 기준연령은 평균 71.4세이며, 특히 자신의 연령이 높을수록 노인의 기준연령도 더 높게 지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스스로를 노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노인이 많다는 방증이다.

노화는 자연의 섭리인데, 우리는 왜 마음 놓고 늙지도 못하는 것일까? 젊어 보인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 된 시대지만, 아무리 막아보아도 노화를 완벽히 차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처럼 기왕에 먹는 나이, 나이 먹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잘 늙어가는 것은 어떨지 …

세월은 주름만 남기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젊었을 때는 도저히 알지 못했던 인생의 경험과 지혜도 선물한다. 60~70년, 아니면 그 이상 살아냈다면 그깟 주름 몇 줄이 뭐 그리 무서울까.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야 눈 감으면 안 보이지만, 세월이 새긴 내면의 성숙과 노년의 지혜는 눈을 감고도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쥬시 토마토(The Juicy Tomatoes)>라는 책에서 저자가 말하듯 풋내나는 토마토가 세월의 햇살과 양분을 먹고 잘 익어 달콤하고 영양 많은 과즙이 한가득 찬 빨간 토마토로 변해간다. 얼굴 위 주름 뒤에는 인생의 경험과 삶의 여정에서 얻어낸 지혜가 숨어 있다. 주름이 자랑거리는 아니겠지만, 인생의 경험과 삶의 지혜는 세월이 준 훈장이자 자랑거리임에 틀림없다. 기왕에 보내는 세월, 늘어나는 나이, 이제 우리부터 당당하고 아름답게 나이를 받아들이고 즐기며 멋지게 늙어가는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한정란 교수는 연세대에서 학사·석사·박사(교육학)학위를 취득했다. 지난 7월 한국노년학회장에 취임했다. 현재 서울시 동작50플러스센터 운영위원장, 충남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교육부 공공부문 인적자원개발 우수기관 인증위원회 위원이다. 제2차 저출산·고령사회정책실무위원회 위원, 한국노년교육학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노인교육론>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