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옥련동에서 … 세계로 나아갔던 백제 사신들

 

▲ 중국 양나라에 파견된 사신을 그린 그림인 '양직공도'의 백제사신도
▲ 중국 양나라에 파견된 사신을 그린 그림인 '양직공도'의 백제사신도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 차지한 백제는

황해 오가는 주요통로의 세력 넓히며
근초고왕 때부터 인천을 전진기지로

중국과 특산품 교환·선진문물 도입해
일본에 재전파하며 인적교류도 활발
항해·조선술 뛰어나 동남아까지 왕래
중국 사서에도 영토기록 많아 연구 필요


인천은 백제 초기 대중국 교섭의 전진기지였다. 백제의 사신들은 지금의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능허대(凌虛臺)에 이르고, 이곳의 한나루(大津)에서 바람을 기다렸다가 산둥반도로 출항하였다. 능허대의 한나루는 백제 근초고왕(372년)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와 온조가 각기 미추홀과 한성에 터전을 잡았다. 인천은 비류백제의 터전이었다. 그 후, 온조가 비류를 흡수하고 한강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백제는 5세기 중반 고구려에게 한강을 빼앗기기 전까지 한강을 통해 황해로 나가고 황해를 건너 중국과 교류하였다. 백제가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을 차지한 것이다.

한강은 황해로 들어가는 한반도의 중요한 강이다.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한강을 대중국 교섭의 주요교통로였기 때문이다. 또한, 강 주변은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고대로부터 한강을 차지하는 국가가 고대사의 주역이 되었다.

백제(百濟)의 어원은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경영하는 나라(百家濟海)'에서 나왔다. 백제가 일찍부터 황해를 경영하는 해상강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고이왕 때인 280년에 국가체제를 갖추고 중국의 서진(西晉)과 통교하였다. 10년간 8회의 사신이 황해를 오갔다. 백제가 황해를 무대로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한 시기는 남북조시대다. 특히, 남조(南朝)의 송(宋)·제(齊)·양(梁)·진(陳)과는 33회에 이르는 사신을 보냈다.

백제와 남조가 황해를 오간 도시는 인천과 난징(南京)이다. 능허대의 한나루를 출발한 백제의 배는 강화만(江華灣)에서 황해를 횡단해 중국 산둥반도의 청샨터우(成山頭)에 도착했다. 다시 연안을 따라 창장(長江)까지 내려간 후 강을 거슬러 난징에 도착하는 항로였다.

백제는 대중국 사신을 통해 방물을 교환하였다. 백제에서 보낸 방물은 과하마(果下馬), 빛을 내는 갑옷(明光鎧), 철갑(鐵甲), 조각한 도끼(雕斧) 등이다. 또한, 남조시대의 『양서(梁書)』에는 아신왕 시절에 생구(生口)를 보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생구는 포로를 의미한다. 당태종은 백제가 철갑과 조부를 보내오자 매우 흡족하여 비단 도포와 채색비단 3000단을 주기도 하였다.

백제는 사신단 교류를 통해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도입하였다. 유교·불교 등의 경전은 물론 박사들을 모셔왔다. 또한, 신무기도 도입했다. 이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선진문물을 도입한 백제는 전파에도 힘썼다. 백제는 왜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들이 중국에서 수용한 선진문물을 재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백제는 일본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항로도 한나루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을 출발한 백제선은 황해연안을 따라 남하한 후 제주해협을 거쳐 쓰시마(對馬島)와 이키시마(壹岐島)를 지나고 간몬해협(關門海峽)과 세토내해(瀨戶內海)를 통과하여 오사카(大阪)에 도착하였다.

근초고왕 때에는 아직기와 왕인을 파견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었다. 무령왕 때에는 오경박사를 파견하여 일본 왕실에 유교경전을 학습토록 하였다. 무왕 때에는 책력과 천문지리서, 둔갑 및 방술서 등 각종 서적을 전해 일본이 다양한 선진문물을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인적교류도 활발하였다. 율사(律師)와 선사(禪師)는 물론 불상과 사찰을 지을 수 있는 기술자들도 파견하였다.

이처럼 백제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항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일찌감치 황해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제는 황해에서의 제해권(制海權)을 공고히 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해상강국이었다.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로 황해를 주름잡았다. 이는 의자왕의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당시 왜국의 실권자에게 바둑판을 선물하였다.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바둑판에 상아로 선을 만들었다. 화점(花點)은 꽃무늬로 장식하였다. 자단목의 원산지는 인도 남부의 스리랑카이다. 상아 역시 인도와 동남아시아가 주산지이다. 의자왕이 선물한 바둑판은 백제의 해상교역활동이 황해는 물론 인도와 동남아시아까지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증거물이다.

김부식은 자신이 집필한 『삼국사기』에서 『신·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의 영역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越州)이며, 남쪽은 왜(倭)인데 모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북쪽은 고구려가 있다. 백제의 왕이 있는 곳은 동서로 두 성이 있다'

월주는 지금의 중국 저장(浙江)성의 양자강 남쪽 회계(會稽)지역이다. 이 기록은 백제가 황해를 내해(內海)로 삼아 중국 동부와 한반도의 서부를 아우르는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의 왕들이 동서로 두 성에 있었다는 것도 내륙백제와 반도백제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중국의 사서인 『송서(宋書)』, 『양서(梁書)』, 『남제서(南齊書)』, 『북제서(北齊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에도 기록되어 있다. '양직공도(梁職貢圖)'에는 백제가 요서지역을 차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많은 사서들은 위서가 아니다. 중국의 사서가 백제의 영토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이 같이 기록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고대사 중 백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백제의 영토에 있어서는 이러한 사서의 기록들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 지금의 옥련동에 있는 능허대로 향할 때 문학산성을 넘어 갔다. 그의 가족들도 문학산까지 배웅을 왔다. 그리고 저 멀리 능허대가 보이는 고갯길에서 이별을 했다. 사신들은 고개에서 떠나지 않고 서있는 가족들을 돌아보며 "잘 있으라"고 세 번 불러보고 능허대로 향하였다. 이때부터 이 고개를 '삼호현(三呼峴)'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오는데,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면서 '사모지 고개'로 불리게 되었다.


 


[어찌나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 조선시대 한시로 남은 '능허대']

 


능허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디에 있었기에 그리 아름다웠을까.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60)에서 능허대의 설명을 살펴보면, '청량산의 한 줄기가 바다에 다다라 끊어져 절벽을 이루는 듯 하다가 다시 솟아오른 곳'에 있었다.

이곳에 올라서 바다를 바라보는 풍경은 한 마디로 절경이었다.

17세기 조선시대 관료이자 학자였던 권시(權)의 저서 『탄옹집(炭翁集)』에는 「능허대(凌虛臺)」라는 한시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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