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산업 한때는 호황요즘은 일감 줄어 씁쓸
지난 23일 경기도무형문화재 지장(紙匠) 장성우(52) 씨가 인터뷰를 통해 전통문화 전승에 겪는 무형문화재들의 고충들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23일 경기도무형문화재 지장(紙匠) 장성우(52) 씨가 인터뷰를 통해 전통문화 전승에 겪는 무형문화재들의 고충들을 호소하고 있다.


금박장, 나전장, 누비장, 단청장, 악기장 등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돼 온 무형의 문화적 유산을 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라 부른다. 무형문화재는 100년 이상 내려온 고유의 전통문화여야 지정 대상이 될 수 있다. 오랜 세월 장인의 기술을 가진 무형문화재의 기와 예능은 전수 과정을 거쳐 다음 사람에게 전승돼야 전통문화의 명맥이 끊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무형문화재가 현실적 문제에 부딪히면서 100년 전통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9월 23일 새벽 5시, 동이 채 뜨지도 않은 이른 시각, 가평에 사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지장(紙匠) 장성우(52) 씨는 한지를 만드는 작업장으로 나설 채비를 한다.
전통방식 그대로 종이를 생산하다보니 하루 생산량은 100장 남짓. 일손이 없는 장씨는 하루 반나절 이상을 종이 만드는 일에 매달린다.

더위가 한풀 꺾인 9월 하순이지만, 그의 작업장 안은 냉방장치 하나 없이 후텁지근한 열기로 가득하다. 작업실 한 쪽에 쌓인 닥나무 껍질은 값비싼 재료비를 아끼려 장씨가 직접 작업장 앞마당에서 기른 것이다.
손쉬운 현대 기계식을 두고도 전통방식을 고집해야 하는 무형문화재의 종이는 재료부터 사용하는 도구 하나까지도 옛 방식을 따른다. 국가무형문화재이자 장씨의 부친 고(故) 장용훈 한지장 때부터 써 온, 손때 묻은 낡은 도구들이 여전히 사용된다.

장씨는 "일전에는 동네마다 지방이 있을 정도로 한지산업이 호황을 누렸지만 현재는 인력도, 수요도 많지 않다"며 "작업장 장비도 두 대 중 하나만 사용할 정도로 일감이 줄었다"고 씁쓸해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겐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이제 막 전역을 했는지, 군인 태가 역력한 청년 전수생이 전통종이 만드는 일을 배우겠다며 장씨 앞에 나타났다. 전수생이 장씨에겐 한 줄기 희망과 같았다. 요즘 같은 때에 지장이 되겠다고 선뜻 나서는 청년이 흔치 않기에 장씨는 열과 성을 다해 전승에 힘을 쏟았다.
한지를 만드는 과정은 까다롭거나 어렵지 않다. 다만 우수한 품질의 종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오래도록 기술과 감각을 익혀야 한다. 무형문화재 보유자 수준에 이르려면 상당한 인내심과 노력을 요한다. 청년 전수생도 그랬다. 숱한 시행착오를 경험해야 했다. 어느 작업하나 수월한 것은 없었다. 자급자족한 재료들을 직접 깎고, 풀고, 뜬다.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것은 대나무 발로 떠낸 종이의 이물질을 골라내는 정도다. 그러나 작업의 고단함보다 생활고를 이겨내는 일이 더 힘들다.

현실의 장벽 앞에 청년 전수생은 맥없이 무너졌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전수생은 6개월만에 전승을 포기했다.
장씨는 "사비를 털어 전승자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지만 한계에 부딪혔다"며 "전수생 한 명이 중도 포기하면 또 다시 새로운 전수생을 찾아 교육을 이어가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오늘 하루도 전수생 없이 홀로 한지를 만들며 버티고 있는 장씨는 대대로 이어져 온 전통종이 만들기의 명맥이 언제 끊길지 몰라 안타까운 한숨을 내쉰다.

/글·사진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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