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공존, 인천을 슬그머니 꺼내다
▲ 검은 설탕의 시간 양진채 지음 강 372쪽. 1만5000원.

"자주 '아득하다'란 말을 떠올린다. 누군가 '짼 배에 소금 뿌리기'라고 했던 말도 떠올린다. 건너야 할 마음들이 주춤거리며 건너지 못하고 있다. 다음 소설집을 펴낼 때는 '명랑'이라는 한없이 가볍고 발랄한 단어를 떠올리 수 있었으면 좋겠다."('작가의 말' 중에서 369쪽)

양진채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검은 설탕의 시간>에는 '상실'과 '기억'이 공존한다. 사람, 사물, 사건 등의 대상을 '잃어 버린' 상실을 마음과 시간 속에서 '잊지 않는' 또는 '잊지 못하는' 기억을 함께 숨겨두거나 슬그머니 드러낸다.

이 책의 인물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자들이다. '베이비오일'의 화자는 화재로 가장 친했던 친구 선희를 잃었고, '마중'의 화자는 남편을 잃었으며, '북쪽 별을 찾아서'의 '나'는 어릴 적 동경하던 선배와 그들이 함께 '아지트'로 삼았던 장소를 잃어버릴 것이 확정되어 있다. '부들 사이'는 특히 이 회복 불가능한 상실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초점화자 기철은 새끼손가락 반 마디를 자신이 사냥하는 뉴트리아에게 베여 잃은 인물이다. 기철이 잃은 것은 단지 손가락 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대상들에 대한 동경이었다.

양진채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인천 안에 있는 장소들이나 인천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새겨진 공통된 기억, 또 때로는 이미 잊혀져버린 장소나 인물, 사건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그러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인천 안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와 역사 안에서도 중요하게 기억되어야 하는지, 우리가 그것들을 기억한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인천 근대사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동일방직 노조 똥물투척사건의 기억에 붙들린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애'뿐 아니라 '북쪽 별을 찾아서'(북성포구, 긴담모퉁이), '플러싱의 숨쉬는 돌'(북성포구), '부들 사이'(수문통), '검은 설탕의 시간'(인천 내항), '마중'(자유공원), '허니문 카'(송도유원지) 등 이 책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담은 이야기가 인천의 여러 장소들 위에서 펼쳐진다.

특히 표제작인 '검은 설탕의 시간'에서는 항만 노동자였던 아버지와 시위하다 붙잡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게 된 아들의 이야기로 인천항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갖는 의미와 당시 시대상을 가족의 아픈 경험을 통해 그려냈다.

문학평론가 양재훈은 작품해설에서 "대상의 결여에서 대상으로서의 결여로, 또는 결여된 대상에서 결여라는 대상으로 초점이 옮겨졌다고 해도 좋다. 이제 상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자리 매겨졌다"거나 "과거는 일상에 지장을 주지도 않고 어느새 잊어버린 채 살게 되지만, 삶의 방향을 이미 틀어버린 사건으로서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며 기억이 불러온 다른 시간이 끊임없이 일상에 개입해 들어오며, 때문에 일상 속에서 언제나 영원히 동결된 시간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양진채 작가는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스카 라인'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소설집 <푸른 유리 심장>, 스마트 소설집 <달로 간 자전거>, 장편소설 <변사 기담> 등을 펴낸 바 있으며 인천시 미추홀도서관의 '2019 인천문학작가'로 선정됐다.

/여승철 기자 yeopo99@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