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우현을 제대로 보는 일은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한 것과 비견할 만하다." 2013년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전집(10권) 완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이기웅 열화당 대표가 한 말이다. 그럴 만큼 고유섭(1905~1944)이 이룬 학문적 성과는 혁혁하다. 한국미에 혼을 불어넣은 우현은 인천 태생이다. 현 중구 용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마흔살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우리나라 첫 미술사학자로서 그가 남긴 글들은 후학들에게 거듭 읽힌다. 우현이란 호(…玄之又玄, 衆妙之門.-노자 도덕경 1장)에서 말하듯, 그는 일찌감치 노자(老子)에 심취했을 정도로 인문학적 소양에 아주 뛰어났다. 한국 미술사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다.

우현은 당시 경성제대에서 조선인 처음으로 홀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그후 1933년 4월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일제 강점기때 조선 사람이, 그것도 서른이 채 안된 이가 관장을 맡는다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만큼 우현은 이미 독보적인 학문 세계를 이룩했다. 천재적이면서도 소박했던 우현의 삶을 짚어보기 위해 인천일보는 기획연재물을 싣기도 했다. 그동안 책이나 글을 통해 우현의 삶을 돌아보는 시도는 있었지만, 언론에서 그를 기리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한국이 낳은 '천재 학자'인 데도 언론에선 소홀했다.

인천 태생의 걸출한 '미술 학도'가 또 있다. 석남(石南) 이경성(李慶成·1919∼2009)이다. 현 동구 화평동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미술관 제도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1세대 미술평론가로 꼽힌다. 석남은 한참 선배 우현에게 박물관의 중요성을 듣고, 온힘을 쏟은 끝에 국내 첫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장을 1945년부터 1954년까지 지냈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제9대와 11대 관장을 맡기도 했다. 석남은 학예연구사 제도 도입 등 초창기 미술관 기틀 마련과 정착에 큰 역할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0주년과 석남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경성을 회고하다' 전을 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난 27일부터 내년 3월29일까지 이어진다.

"…우현 동상 제막은 우리 인천사(史)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이정표이고, 인천의 명예와 자존심의 표상이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국문학)가 고유섭 동상 건립문에 적은 글이다. 오늘을 사는 인천인들이 곱씹을 만한 대목이다. 새얼문화재단은 1992년 우현을 '제1회 새얼문화상' 수상자로 정하고, 인천시립박물관 앞마당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