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도 왜곡된 역사
▲ <조선어독본>권5 제4과(1934년) 김정호 마지막 쪽. 김정호 부녀가 옥사하는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김정호에 대한 첫 기록, 그것은 식민사관이다!

선생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목판본 <대동여지도> 22첩이다. 그리고 연구가 깊어지면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란 3대 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제작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선생은 평생 국토정보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 매진한 진정한 학자이자 출판인이요, 조각가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정호' 이름 석 자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기록 중, 비교적 상세한 내용은 일제하 <조선어독본>권5 제4과(조선총독부 발행, 조선인쇄주식회사, 1934)에 보인다. 이 교과서는 식민지 조선 백성 교화용이기에 식민사관이 숨겨져 있다. 식민사관이란 '김정호도 못 알아보는 어리석은 조선'이다. 이만한 기록이라도 남았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다. 독본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하는데 10여년이 걸렸다. 팔도를 돌아다닌 것이 세 차례, 백두산에 오른 것이 여덟 차례이다. 인쇄 판목을 구하기 위해 경성에 자리 잡고 소설을 지어 자금을 마련했다. 딸과 함께 지도판을 새기는데 10여년이 걸렸다. 인쇄된 몇 벌은 친구들에게 주고 한 판은 자기가 소장하였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어느 대장에게 주었고 그 대장이 흥선대원군에게 바쳤다. 흥선대원군은 완성된 지도가 외국에 알려질 경우를 두려워하여 수십 년간 고생하여 만든 목판을 태워버리고 김정호와 그의 딸을 함께 옥사시켰다. <대동여지도>는 러일전쟁에서 군사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총독부 토지조사사업에도 긴요하게 활용되었다.

그러고 책 말미를 "아, 정호(正)의 간고(艱苦) 비로소 혁혁(赫赫)한 빛을 나타내엿다 하리로다"라 끝맺는다. 백두산을 여덟 차례 오르고 대원군에 의해 지도 판목은 태워지고 딸과 함께 옥사했다는 말의 진원지가 여기였다. 더욱이 러일전쟁 운운까지 읽으면, 또 한 번 선생을 생각케 한다. 선생이 이런 치욕을 받으려 <대동여지도>를 만든 것은 아니기에 말이다. 더욱이 이 기록에는 교활한 식민사관이 숨어있기에 선생의 삶과 <대동여지도>가 서글퍼진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출간된 우리 초등 국어 5-2학기(혹은, 5-1학기) 교과서에 일제하의 저 기록이 그대로 수록되었다는 슬픈 사실이다. 지금까지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선생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는 저 해방 후 교과서가 정점을 찍어 놓았다. 해방 후 교과서 집필진의 이러한 교과서 왜곡 제작은 통탄할 일이며 만고의 못된 행위이다.

그런데 <조선어독본>권5 제4과 김정호에 대한 내용은 동아일보 1925년 10월9일자에 '고산자를 회함'이란 글을 바탕으로 엮은 것이었다. '고산자를 회함'은 "一. 아직 알리지 아니 하였지마는 알리기만 하면 조선 특히 요즈막 조선에도 그러듯한 초인초업이 있느냐고 세계가 놀라고 감탄으로 대할 자는 고산자 김정호 선생과 및 그 대동여지도의 대성공이다. 그렇다. 그는 대성공이다. 누구에게든지 보일만하고 언제까지든지 내려갈 위대한 업적이다. 그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불우한 사람이다. 그러나 김정호 및 대동여지도는 조선의 국보이다"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글은 1~6까지 1925년 10월9일, 10일자 이틀에 걸쳐 강개한 논조로 이어진다. (이 글에서는 <대동여지도> 원본이 다 불태워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1923년에 이미 조선총독부에서 <대동여지도> 목판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 글은 경성제대에서 실시한 고지도 전람회에 <대동여지도>가 전시된 것을 보고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 마지막은 "아직도 잘 알리지 아니 하였지마는 마침내 아무 보람도 더 들어나게 될 이 잠룡적 위인에게 대한 경앙이 새로워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노니 조선이 은인 구박의 잘못을 통매심책(痛悔深責)할 날이 과연 언제나 오려나 어허"라는 체념으로 맺는다. 이는 우리 민족의 어리석음을 간교하게 주입시키려는 일제치하 식민사관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우리 것보다는 외국 문물을 더 선호한다. 학문 역시 우리 고전보다 외국 현대 이론에 더 귀 기울인다. 저 말이 지금도 맞기에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영 불편하다.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