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열여덟 해…뒤늦은 송도유원지의 '해방'
▲ 송도유원지 놀이기구 입장권을 판매하던 종합매표소의 간판이 아직 남아 있다. /사진제공=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

 

▲ 1960년대 초 송도유원지 전경.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송도유원지는 1987년 전국 1호로 종합휴양업에 등록했다. 당시 송도유원지 정문 매표소 건물에 실제 붙어있던 동판.  /사진제공=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

 

▲ 송도해수욕장 홍보물. '어린이 놀이터, 캬바레'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안내되어 있다.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

 

▲ 인천 연수구 옥련동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건너편 인도에 실제 있었던 송도유원지 이정표. 현재 인천도시역사관의 <없었던 섬, 송도> 기획전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미군 철수 후 재개장 논의 중 6·25전쟁…UN군 휴양지로 징발
1958년 해제 이후 운영권 분쟁…1963년 7월에야 시민 품으로


일본이 황금빛 관광 자본주의를 꿈꾸며 인천 땅에 조성한 송도유원지. 이 송도유원지를 대한민국 국민들이 온전히 누리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37년 개장한 이후엔 일본군이 전유물처럼 쓰다가 해방이 되고는 미군이 주둔했다. 송도유원지는 6·25전쟁 이후에도 참전국이던 영국군의 휴양지가 됐다.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송도유원지는 우리 국민들에게 그저 딴 세상 별천지였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와 전쟁의 참극을 견뎌내던 선조들에겐 강대국의 군화발로 얼룩진 송도유원지 자체가 고통이었을 수도 있다. 인천 땅에 존재하면서도 인천의 것이 아니었던 송도유원지. 비극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송도유원지가 시민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과정을 알아본다.

인천도시역사관과 인천일보가 공동기획 한 '없었던 섬, 송도' 4번째 편은 '송도유원지 다시 문 열다'이다.


▲일본·미국·영국군…, 그들만의 유토피아
1945년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됐다. 그러나 일본군이 장악하던 송도유원지는 다시 미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미군의 주둔으로 송도유원지는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됐을 것이라 추정된다.

5년이 지난 1950년 당시 표양문 인천시장의 시정 연설에서 송도유원지를 시민들에게 개방하는 '재개장'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송도유원지 재개장을 목하 추진 중이므로 금년에 개방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동아일보도 1950년 4월11일자 신문에 '송도유원지 금년엔 개방'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아마 이때부터 군대가 아닌 시민들에게 유원지를 개방해야 한다는 여론이 시작됐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개방이 추진되는가 싶던 그 해 6월 6·25전쟁이 발발했다. 재개장이 무산됐을 뿐만 아니라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참전국이었던 영국을 포함해 유엔군은 송도유원지를 그들의 휴양지로 징발한다. 아예 군사시설이 된 셈이다. 민간인 접근은 더 어려워졌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유엔군은 한국에서 철수한 1958년까지 송도유원지를 그들만의 리그로 활용했다.

징발조처가 해제된 때는 1958년 6월10일로 기록된다. 경향신문은 1958년 6월12일자 신문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썼다.

"전란 이래 유엔군이 사용해오던 인천 송도유원지 해수욕장 '풀'은 10일 징발이 해제되었으므로 올여름부터는 경인지방 피서객들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풀'은 영국군이 계속 징발 사용해왔던 것인데 국방부와 주한영국군 간에 정식으로 그 징발해제 수속을 완료한 것이다."

▲험난한 재개장
한국에 주둔하던 외세가 물러나며 송도유원지 개장이 가능하려나 싶었다.

하지만 운영권을 두고 업체끼리 충돌하며 이마저도 순조롭지 않았다.

송도유원지를 둘러싸고 '송도임해토지주식회사'와 '송도해원관광회사'가 등장했다. 송도임해토지주식회사는 흥한재단 화신백화점 박흥식 회장이 1대 주주인 주식회사다. 송도해원관광회사는 전쟁 직전 송도유원지 재개장 운영권을 확보한 곳이다.

이 두 업체가 송도유원지의 유원시설과 토지·별장 소유권을 나눠 갖고 있었다. 하나의 송도유원지가 두 개로 쪼개져 있었다.

둘은 재개장 운영권을 두고 분쟁을 벌였으며 끝내 합의를 하지 못한 채 1961년 7월, 호텔과 식당, 놀이기구 등 편의시설은 놔두고 해수욕장만 임시 개장하는 처지가 됐다.

상황이 이쯤되자 인천시가 나섰다. 당시 유승원 시장은 시가 전면에 나서 송도유원지 개발을 추진하도록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1962년 8월 시는 인천도시계획 유원지결정과 실시계획 인가를 내주며 해원관광과 흥한재단 간 운영권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듬해인 1963년엔 인천시는 서울과 인천의 자본이 공동 출자한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해 송도유원지 운영을 맡긴다.

이후 송도유원지 개장은 급물살을 탄다. 경향신문 1963년 5월10일자 기사를 통해서도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3백만 경인시민들의 유일한 피서지인 인천 송도유원지가 옛모습을 되찾아 오는 6월15일에 문을 연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송도 개발 사업이 그간 인천도시관광주식회사에 의해 착수되어 당초 7월1일 개장하려던 것을 보름 동안을 앞당겨 6월15일경 개장을 목표로 작업에 급 '피치'를 올리고 있다.

70만 평의 널따란 놀이터 송도유원지는 5개년 개발사업에 따라 제1차 연도인 금년에는 40만 평을 활용, 풀(pool)과 각종 부설물을 신축하리라하는데 하루 3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7만4300㎡의 수영장이 이미 지난 4월20일경 준설작업이 완료됨으로써 요즘에는 모래반입 작업과 정지 작업이 한창이다. 그리고 풀 주위에는 매점 20개소 탈의장 20개소 방갈로 50동 샤워장 2개소 임시숙소 2개소 천막촌 콘세트 등을 화려하게 신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곧 공사에 착수하리라 한다."

▲하루 입장객 2만 명. 찬란했던 그 시절
1963년 7월24일 드디어 송도유원지가 시민 품으로 안겼다. 재개장에 성공한 송도유원지는 해수욕장뿐 아니라 호텔과 보트장, 놀이시설, 캬바레 등을 갖춘 종합리조트로 거듭났다.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으며 1일 입장객이 2만 명을 넘어서는 수도권 최대의 휴양시설로 부각됐다.

재개장한 송도유원지에서 전국임해촬영대회, 옛찾기 노래자랑대회, 씨름대회와 같은 각종 문화행사들도 추진되며 명실상부 인천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인천시는 유원지에 닿는 접근성도 높이기 위해 교통편의 증진에도 힘썼다. 경인고속도로 종점과 송도신도시를 잇는 송도임해관광도로를 1976년 개통했다.

이어 당시 5억2000만원을 투입해 용현동~송도유원지 해안관광도로도 준공했다.
누구나 쉽게 유원지를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인천일보·인천도시역사관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