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 1. 3·1 운동 역사적 그날,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였다
▲ 안성시 원곡면사무소 앞 3·1운동 기념동상. /사진제공=안성시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1919년 3월11일 오전 11시. 안성 양성초등학교(옛 양성공립보통학교) 운동장은 독립을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태극기를 손에 굳게 쥔 학생과 교사들은 운동장이 떠나갈 듯한 외침을 이어갔다. 그들 앞에선 남진우 선생. 남 선생은 만류하던 일본인 교장의 손길을 뿌리치고 한가운데서 목이 터져라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안성 양성면 덕봉리 출신이자 보성전문학교 학생이었던 남진우 선생은 이날 오전 안성 양성초등학교를 찾아 학생들과 교사들을 모두 운동장에 모이도록 했다.

그가 단호한 눈빛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자 학생들과 교사들도 손에 쥐고 있던 태극기를 위로 치켜들며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똘똘 뭉친 양성초 한국인 학생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양성초 독립운동 만세시위는 안성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이후 안성을 비롯한 도내 학교 항일운동에 도화선이 됐다.

남 선생이 이끄는 독립만세 운동은 이렇게 시작을 알렸다.

그는 4월 1일 원곡면, 양성면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재소 등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일제에 저항을 이어가던 남 선생은 1919년 12월4일 일본 경찰에 체포돼 결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등을 이유로 태(苔) 90도(度)를 받았다.(곤장 90대 형벌)

남 선생이 이끈 양성초등학교 항일독립운동은 이후 경기도내 곳곳의 학교로 퍼지는 계기가 됐다.

학생들이 항일운동으로 체포되면서도 의지는 결연했다. 도내 곳곳에서 한국인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동맹휴학과 비밀결사 운동을 단행했다.

1919년 3월3일. 36명의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의 함성도 일대를 가득 메웠다. 이들은 밤에 기숙사를 빠져나와 일제에 항거하고 그날 서울에서 전개되는 독립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농림학교 학생들의 저항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1920년대에는 지속적인 독립만세시위와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1923년 5월3일에 농림학교 한국인 학생 전원이 학교를 상대로 조선인 차별금지 등 7가지 요구사항을 걸고 동맹휴교를 하고 1926년에는 순종 승하에 대한 자진휴학도 시행했다.

1926년 5월3일부터 7일까지 오산공립보통학교 6학년 학생 71명은 일제의 비교육적 행위 및 민족차별에 항의해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오산공립보통학교는 성호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뀐 이후 지금은 성산초등학교가 그 터를 지키고 있다.

성남 낙생고등학교에서도 1919년 3월27일 인근 광주군 돌마면과 낙생면 주민 1000여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기도내 광복 이전에 설립된 학교는 260여개로 그 수가 상당하다. 학교 어딘가 항일유적의 역사가 숨어있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도교육청은 260여개의 학교를 포함해 추가적인 항일운동의 역사를 가진 학교들을 발굴하고 있다.

박영민 경기도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주무관은 "독립운동이 일어난 학교들을 발굴해 학생들이 선열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안내판을 토대로 교육 프로그램 개발 및 체험의 기회도 제공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남진우 선생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김도희 기자 kdh@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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