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선 농협안성교육원 교수

 

바야흐로 완연한 가을, 천고마비의 계절이 다가왔다. '천고마비(天高馬肥)'는 '하늘은 높고 말은 살쪘다'는 뜻으로 하늘이 맑고 모든 것이 풍성함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의 유래를 보면 그 정서가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중국인들에게 천고마비는 바로 북방 유목민들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담고 있는 말이다.
가을이 되면 몽골 일대 초원의 풀들은 서서히 마르기 시작하고 북방은 곧 혹한의 겨울을 맞이한다. 그러면 북방인들은 겨울 양식을 확보하기 위해 여름 내내 드넓은 초원의 풀을 뜯어먹고 자란 건강하고 날쌘 말을 타고 남쪽의 중국 창고를 넘보는 것이 생리였다. 이처럼 중국인들에게 천고마비란 전쟁을 대비하는 우려와 두려움이 엄습하는 공포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도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예나 지금이나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천고마비의 시절을 면할 날이 거의 없는 듯하다.
최근 중국과 러시아 전투기는 작정하고 독도 영공을 어슬렁거리고,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지 이미 오래다.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판결을 문제 삼아 반도체 부품 수출을 거의 끊어버리고 있다. 북한마저 미국과 대화가 좀 된다고 판단한 듯 한국은 빠지라고 연일 아우성이다. 그래도 가장 믿을 만하다고 여겼던 동맹국 미국은 매년 대폭적인 방위비 인상을 요구한다. 근래 미국 대통령은 한·미 간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정에서 방위비 인상이 '월세 받기보다 쉬웠다'는 식으로 우리를 조롱하고 경시한다. 하지만 이것이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 다소나마 자강(自强) 전략에 힌트를 던지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정(鄭)나라 무공(武公)이 변방의 오랑캐 호(胡)를 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먼저 자기 딸을 호의 임금에게 시집보내 그의 환심을 산 다음, 신하들에게 묻는다. "이제 그동안 기른 힘을 가지고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어느 곳을 치면 좋겠는가?" 그때 무공의 속마음을 읽고 있던 관기사(關其思)란 대부가 대답한다. "호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무공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호는 형제의 나라다. 그런데 호를 치라고 하다니 말이 되느냐?" 그리고 관기사를 목 베어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호 임금은 정나라가 진심으로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줄 알고 대비를 게을리했다. 기회를 노렸던 무공은 불시에 쳐들어가 호를 완전히 장악했다. <한비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인간 심리의 허점을 이용하여 상대를 이기는 방법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준다. 국제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굳이 자신의 '본심의 패'를 노골적으로 보여줄 필요나 이유는 없다. 소리 없이 조용히 의도를 감추고 내실을 차근차근 다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얕잡아보거나 흔들지 못하도록 힘을 기르는 자강이 긴요하다.

임진왜란 기간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 懲備錄>이란 책 제목을, 다시는 이러한 환란이 일어나지 않게 미리 대비하자는 뜻으로 붙인다고 강조했다. 국가나 개인도 마찬가지다. 예상되는 위기를 미리미리 준비하고 대비한다면 큰 곤경이나 환란을 피할 수 있다. 예방이 치료보다 나은 법이다.'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렌버핏의 격언처럼 "비를 예측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방주를 짓는 것이 중요하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했다. 우리 모두 명심 또 명심할 말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