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자본의 욕망, 해안 풍경을 바꾸다
▲ 송도유원주식회사에서 1937년 발행한 송도유원지 팸플릿. 송도유원지에 있었던 조탕, 아동유희장, 호텔 등의 시설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잡지 <조선> 1936년 7월호 표지.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잡지 <조선> 1936년 7월호에 실린 인천부윤 나가이 테루오의 기고문 가운데 관광 인천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부분. /사진제공=국립중앙도서관

 

▲ 송도유원지 시설 전경으로 만든 사진엽서. /사진제공=인천시립박물관


인천부윤 나가이 테루오 '관광도시 건설' 주장에 경인 자본가 화답
165만여㎡에 수도권 제일 유원지 만들어 식민지 본국의 위용 뽐내

바다를 일구며 살아가던 옥련리 한적한 해안가 마을에 언제부턴가 유원지가 생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사 장비가 왔다 갔다 하며 땅을 파고 매일 뭔가를 실어다 날랐다. 어느덧 해수풀장과 아동유희장, 조탕(潮湯), 호텔이 들어섰다. 일본군이 놀러오는 별장지라고 했다. 1937년 일제강점기 송도유원지는 이렇게 생겨났다. 빼어난 이곳의 풍광을 활용해 관광으로 돈을 벌고 식민지 한국을 잠식하겠다는 일본의 야욕이 그대로 드러난 결과물 이었다.

인천도시역사관과 인천일보가 공동기획한 '없었던 섬, 송도' 3번째 편으로 '관광 인천'을 향한 일제강점기 송도유원지의 조성 과정을 살펴본다.


▲관광 인천을 향하여
근대의 시작과 함께 철도 등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관광'이라는 새로운 소비문화가 탄생했다. 개항 이후 인천이 상업과 공업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항만과 철도 등 편리한 교통과 서울에서 가까운 입지조건 때문이다. 이러한 입지조건은 일본 자본가의 관심을 관광으로 돌리게 했다.

1933년 8월부터 1942년 1월까지 인천부윤을 지낸 나가이 테루오(永井照雄)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했던 잡지 <조선> 1936년 7월호 기고문을 실었다.

"당부(當府)의 역사를 연구하고 동시에 인천항 개항의 목적에 감안하여 판단한 결과, 인천부의 부시(府是)는 인천을 상업도시로서 공업도시로서 관광도시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고, 경인간京仁間 경제 블록을 형성하여 장차 형식적이든 실질적이든 경성과 인천이 하나가 되어 대도시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천부의 부시(府是·인천부가 앞으로 지향해야할 바)의 하나로 관광도시의 건설 곧, '관광 인천'을 주장한 것이다.

나가이 인천부윤의 글에서 '관광 인천'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됐다. 이후 언론사 등에서 영향을 받아 '관광 인천'이라는 말이 고유명사처럼 쓰이기도 했다.

관광 인천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거주하며 생활하던 재조선일본인들이 관광과 그에 수반하는 자본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특히 인천에서 근대 관광이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 관광은 제국주의 정책의 산물로 탄생했다.

식민지 본국인에게는 국가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강화시키면서 식민지인에게는 식민지 본국의 근대문물을 심어주며 상대적으로 열등의식을 불러오는 기능을 하기도 했다.

일제는 일본의 마쓰시마(松島·송도)에 버금가는 휴양지를 건설하려는 뜻을 송도유원지에서 이뤄냈다.

▲송도유원지의 탄생
월미도에 건설한 조탕과 해수욕장이 관광지로 대성공을 거두자 관광을 통해 부를 축적하겠다는 그들의 욕망은 송도로 향했다.

'관광 인천'이라는 슬로건 뒤에 감춰있던 자본의 욕망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송도는 인천뿐 아니라 수도권 제일의 관광지가 됐다.

인천 문학면 옥련리의 해안은 일명 송도라고 불리며 자연의 경치가 좋은 유람 적합지로 알려져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1937년 펴낸 <인천시가지계획 구역 결정이유서>를 보면, "현재 이 지역까지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고 장래 주택지 혹은 위락지로서 적합하므로 특히 계획구역에 편입해야 한다"고 썼다.

조선총독부도 송도 유원지의 개발 이전부터 이 지역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으로 거슬러 생각할 수 있다.

1936년 경인지역 자본가의 출자로 송도유원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주식회사는 곧이어 대 유원지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송도유원주식회사 창립총회 당시 기록을 보면 송도유원지는 총 연면적 165만2892㎡(50만평)에 자본금 200만원이 투입돼 조성됐다.

개발자는 당시 해안을 매립하고 해수를 이용한 풀장(조탕)과 호텔, 해수욕장, 아동유희장을 건설했다. 제방 축조 후 수문을 통해 바닷물을 막아 두 개의 인공호수를 조성하고 북측 호수 무의도 해안의 모래를 옮겨 백사장을 만들어 해수욕장으로 활용했다. 해수욕장 수질은 조수에 맞춰 수문을 열고 닫으며 조절했다. 남쪽 호수에 보트와 선박모양의 화월환(花月丸)을 띄워 해상 연회장을 만들기도 했다.

1937년 7월21일, 송도해수욕장이 마침내 개장했다.

개장 후 송도유원지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40년 여름, 중일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하루 입장객 3000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1936년 4월15일자 동아일보 등 당시 신문들 역시 "5만평 규모의 '대(大) 풀(pool)', 해수풀(조탕)이 국제유원지로 손색이 없다", "스포츠 활동은 물론이고 춘하추동 할 것 없이 굴지의 관광인천을 실현할 수 있을만한 시설"이라고 송도유원지에 대해 보도했다.

▲송도유원지와 수인선
송도유원지는 수인선 개통과도 맞물려있다.

1930년 11월 경동철도주식회사는 여주와 수원을 잇는 협궤철도 수여선을 개통했다.

여주와 이천 등 경기 내륙의 곡창 지대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수원까지 운반하고, 이를 다시 경부철도로 부산까지 실어 날라 부산항을 통해 일본 본토로 반출하기 위해서 였다.
이후 만주사변으로 중국과의 정세가 불안해진 일본은 1937년 7월 수여선을 인천항까지 연장하는 수인선을 개통했다. 중국과의 전쟁이 시작될 경우 중국에서 가까운 인천항을 경유하는 것이 군수미의 운송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인선은 공사기간과 공사비를 절약하기 위해 레일 사이의 폭이 좁은 협궤철도로 건설됐다. 수인선은 남동, 소래, 군자 염전 등 인천 연안의 염전 지대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을 한반도 전역으로 운송하는 역할도 했다.
송도유원지는 이 수인선 건설 도중 착공됐다. 당시 정부는 송도유원지 운영과 임해주택 분양을 위해 송도역을 신설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인천일보·인천도시역사관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