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죽산 조봉암 선생 서거 60주년이 되는 해다.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죽산은 인천을 대표하는 정치인이고, 위대한 독립 운동가였다. 인천 강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줄곧 그곳에서 보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도 강화였고, 옥고를 처음 치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온갖 풍상을 헤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다시 돌아온 곳도 인천이었다. 당연히 해방 이후 정치에 투신한 곳 또한 인천이다.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과 민의원을 지냈고,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 부의장에다 대통령 선거에도 나섰다.

지난 31일 서울 망우리 죽산의 묘소에서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내로라하는 인천의 인사들이 어김없이 행사장 앞자리를 차지했다. 박남춘 인천시장이 추도사를 했고 집권 여당의 송영길·박찬대 국회의원도 모습을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문희상 국회의장,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보내온 조화도 빼곡히 늘어섰다. 하지만 그 뿐이다. 정부는 여전히 죽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강화읍내의 3·1 만세사건으로 처음 일경에 체포됐다. 7년간을 일제 치하의 감옥에서 모진 고초를 겪기도 했다. 신의주 형무소 수감 도중 고문과 추위로 인해 손가락 일곱 마디가 잘려나갔다.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다시 검거됐다가 광복을 맞고 나서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죽산의 서훈이 재검토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종무소식이다. 지금도 국립현충원에는 친일파 60여명이 묻혀 있다. 그 중에는 일제치하에서 "죽산을 체포하고 고문하라"고 지시한 자도 있을 것이다. 해방된 조국 땅에서도 그를 빨갱이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 이도 안장되어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죽산은 독립유공자가 아니다. 현직 대통령이 김원봉 선생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상황에서도 죽산은 인정받지 못한다. 신뢰할 수 없는 일제치하의 짧은 신문 기사 하나가 증거의 전부라고 한다. 하지만 수없이 제출된 반박 자료는 무용지물이다. 누구하나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죽산을 '인천의 인물'로 자랑삼기를 즐겨하는 이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