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정치부 차장

지난 4월15일, 3·1만세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그때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에 있었다. 상하이를 거쳐 항저우를 지나 난징에 닿았고, 충칭까지 이동했다. 닷새 남짓한 여정만으로도 몸은 고되고 잠자리와 입에 맞지 않은 음식에 짜증이 밀려왔다. 임정요인과 가족, 임정을 그림자처럼 도왔던 잊힌 수많은 독립운동가까지 1000㎞가 넘는 고난의 여정을 36년간 어떻게 감내했는지 임정 청사가 있는 중국 도시 곳곳에 닿을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충칭 임정 청사에 전시된 사료를 보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한 전시물을 맞았다. 함께 갔던 후배 기자와 그 전시물 앞에서 울컥한 마음에 서로 멀뚱히 바라만 봤다. 전시물은 '충칭 거주 한인들이 소지한 외국인 신분증'으로 그 속에 적힌 단어에 숨이 멎은 것이다. 바로 '한국'이다.

나라 잃은 설움에 가슴 깊숙이 품었을 조국의 이름 '한국'을 이국에서 쓸 신분증에 적은 것에 고개가 숙여졌다. 신분증 속 인물은 1903년생 홍매영, 직업은 한국독립당원이고 남편은 차동암이라 적혀 있었다. 그 위 같이 전시된 '한국'이란 국적의 또 다른 인사는 안병무였다. 인천에 돌아와 홍매영의 남편 이름은 차이석으로 임시정부 비서장을 역임한 것을 확인했다. 홍매영은 지난해서야 겨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1959년 2월27일 진보당 사건 최종 판결장,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강령을 기초한 이동화도 피고로 함께 했다. 이동화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나왔고, 법관석에 앉은 변옥주 대법관은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식민지 시절 홍매영과 안병무는 조국을 잊지 않으려 이국에서 '한국'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그리고 치열한 독립운동을 거치며 이념 갈등 속에서도 평화통일론을 주창하며 농지개혁을 통해 민중의 삶을 해방시킨 조봉암과 일제가 만든 제도권 속에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이동화 역시 조국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하지만 변옥주는 조선총독부 판사를 거쳐 대한민국 대법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2019년 8월1일. 일본의 만행이 고개를 쭈뼛이 들고 있는 상황에도 국론이 모아지지 않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그래서 한국인 홍매영과 안병배를 뼈아프게 외치는 것이요, 사법 살인된 죽산의 정신이 죽창이 돼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이다. 그때 변옥주는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껍데기만 바꿨을 터다. 아직 죽산은 서훈조차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