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림

무어라도 돼라
그게 엄마의 좌우명이었다
콩나물 키워 열두 가지 반찬 만들고
아구든 아귀든 강냉이든 옥씨기든 올갱이든 고디든
먹도록 만들어 상 위에 올리는 것
그게 엄마가 할 줄 아는 전부였다
노상 소핵교만 졸업했어도
무엇이든 됐을 거라는 말
게우 소핵교 이학년도 다니다 말고
부엌떼기로 들어섰다가
위안부 소녀들 공출해 간다고
한동안 도광동에 숨어 살면서도
콧구멍이 새까맣도록 고골에 불을 피워 상을 차렸다는
그 먼 날들을 들려주며 뭐든 돼라 했는데
돌아보니 온 길도 없고
내다보니 갈 길도 아물거려
주저앉고 말았다
시인은 되는 게 아니라고
엄마는 말할 뻔했는데
뭣 땜에 그랬는지
엄마가 간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엄마도 생각이 참 많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무어'는 정하지 않은 대상이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는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지시 대명사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는 대상인 그 '무어'도 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본래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존재, 유령이나 투명인간 취급 받는 존재들.
이 시에서 '엄마'는 그런 존재로 살아왔다. 겨우 소학교 2학년 다니다 말고 콧구멍이 새까맣도록 고골에 불을 피워 상을 차렸다는 엄마의 이름은 '부엌떼기'이다. 부엌떼기로 살아가면서 엄마가 받았을 차별과 고통과 억압은 "무어라도 돼라"라는 좌우명만큼이나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런 엄마가 "시인은 되는 게 아니라고" 아들에게 말할 뻔한 이유도, 신체적 현실적 고통을 떠나 정신적으로 사람답게 누려야 할 시간을 스스로 파기하고 소멸시켜야만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주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한없이 인색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삶과 존재.
엄마는 아들의 배고픔을 걱정했을 테지만 아들은 이름 없이 살아간 엄마의 존재를 회복시켜 주는 시인이 되었다. 엄마가 간 하늘이 붉은 것은 그런 아들의 삶을 응원하는 아름다운 얼룩일 것이다.

/강동우 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 교수